[촛불혁명 두돌③]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앞으로도 영원히

10월 29일은 2016년 ‘촛불혁명’이 타오르기 시작한 날이다. 촛불혁명은 최순실씨의 국정농단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권력사유화 및 무능 등에 대해 시민들이 매주 토요일 자발적으로 모여 2017년 4월 29일까지 23차례에 걸쳐 열려 마침내 불의의 세력을 내모는 데 성공했다. 전국적으로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했으며,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 관련자 대부분 사법처리됐다. <아시아엔>은 촛불혁명 2주년을 맞아 비영리사회단체 나눔문화와 함께 ‘촛불혁명’의 의미와 주요장면을 되돌아본다. 지난해 1주년 즈음 나온 <촛불혁명>(김예슬 지음 김재현 외 사진 박노해 감수, 느린걸음 펴냄)을 바탕으로 이뤄졌음을 밝혀둔다.(편집자)

[아시아엔=박노해 시인]  박근혜 파면 이후 촛불광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 “이번만은 죽 쒀서 개 주지 말자”는 다짐들이었다. 그랬다. 늘 혁명 뒤의 반동으로 배반당한 역사였다. 독립투쟁과 8.15 해방은 이승만이 말아먹었다. 4.19혁명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탈취했고, 박정희가 죽은 뒤 80년 봄은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가 5.18 광주 학살로 강탈해갔다.87년 6월항쟁은 직선제를 이뤄냈지만 그 성과를 노태우가 가져가면서 “6.29는 속이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30년 만에 찾아온 혁명의 시간, 촛불시민들은 이번만은 ‘혁명을 빼앗기지 말자’는 절박한 심정의 역사의식과 각오로 마침내 정권교체에 성공, 문재인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피 흘려 싸워 이기고도 늘 패배해온 미완의 혁명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혁명의 역사를 써낸 것이다. 촛불혁명은 인류에게도 깊은 영감과 용기의 빛이었다. 나빠지는 세계의 발작인 듯 트럼프 당선으로 시작해극우 포퓰리즘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암울한 시대에, 민주정부 수립까지 성공한 코리아의 촛불혁명은 위기에 처한 세계 민주주의에 희망과 의지를 주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은 가치관의 일대 혁신이고 우리 인격의 도약이다.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이것을 체험했고 세상에 증명했다.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승리한 혁명의 경험은 공동체의 위대한 자산이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다. 혁명에는 ‘30년 법칙’이 있다. 20대 청년이 자기 시대의 인간 고통과 사회 모순을 끌어안고 저항하는 시간이 15년, 그 성과를 주류 사회로 펼쳐가는 시간이 15년, 그렇게 30년이 되면 그 세대는 기득권이 되어 점차 굳어지고 보수화된다. 아 혁명도 늙어간다.

그리하여 혁명은 낡은 몸을 빠져나와 몸을 바꿔 지속된다. 혁명을 혁명하는, 새로운 혁명아가 다가오도다!촛불혁명의 주체는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지구인류시대의 ‘나-개인’들이었다. 이들의 내면에는 ‘피’와 ‘빛’이 흐르고 있다.

민주화의 피 그리고 인터넷의 빛

민주와 자유와 권리를 체화하며 자라난 젊은 세대. 스마트한 소통으로 세계 첨단의 감각과 지식을 내장한 채 양극화의 아뜩한 길을 걷던 2030세대가 저들의 추악한 실체를 접하며 정치화되고 새로운 혁명의 주체로 나섰다. 스마트폰을 쥔 ‘지민知民’들은 빛의 속도로 뉴스와 정보를 재구성하고, 사태의 진실을 전파하고, 급변하는 정세와 정치 공작까지를 읽어내며, 공유지성의 기발한 상상력과 순발력으로 저항했다.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에 모여 100만 촛불과 한몸이 되고 집회가 끝나면 각자 ‘일상의 참호’에서 검색과 댓글과 문자행동으로 저항하고 SNS를 점령하며 촛불을 이어갔다.

각자도생으로 분리된 ‘혼밥’ ‘혼술’의 개인을 넘어 빛의 신경망으로 연결된 ‘함께하는 혼자’인 나 -들, 이들이 정치와 일상 사이, 운동 조직과 나 개인 사이, 광장과 온라인을 넘나드는 새로운 ‘정치적 전위’로 나서며 촛불혁명을 유쾌하게 창조해나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상 최초로 ‘평민 대중 계급’이 ‘엘리트 지배 계급’보다, 젊은 여성이 남성 권력자보다 더 똑똑하고 앞선 문화감성을 지닌 시대를 맞이했다. 시민과 젊은 여성들은 이리 높아져 ‘느낌 아는’데, 지도층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들은 너무너무 후진 것이다. “민중은 개 돼지다”라던 자들에게 그 ‘무지한 대중’이  빛의 지성을 지녔다는 건 ‘끔찍한 위대함’이다.

특정 조직도 계급도 이념도 아닌 다양한 나 -들이기에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건 ‘경악할 위대함’이다.

나의 지도자가 아니라 나의 대리인이다

이 새로운 정치 주체들이 “이니”를 탄생시켰다. ‘문재인’과 ‘이니’ 사이에는 깊은 시간 차가 놓여있다. 여전히 박근혜는 ‘여왕마마’고 판검사는 ‘영감님’이고 국회의원은 ‘나리님’이신, 21세기에도 왕정시대를 살고 있는 자들에겐 악몽 같은 일일 것이다. 촛불혁명은 권력자에 대한 관계변경을 가져왔다. 대통령이든 장차관이든 판검사든 국회의원이든 그는 나의 대표자가 아니고 ‘대리인’이다. 그는 나의 지도자가 아니고 ‘고용인’이다. 더 정확히는, 내 세금으로 급료를 주고 내 권력을 한시 위임한 계약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계약대로 하라, 법대로만 하라. 신임과 찬사를 줄지 파면과 경멸을 줄지 내가 판단할 테니 투명하게 보고하고 분발하라. “내가 주권자다.” “나는 내가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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