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여의도교당이 모범이 된 까닭을 아십니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필자가 오래 전 인생을 천방지축으로 살다가 ‘일원대도’(一圓大道)에 귀의하고 보니 너무나 인생을 엉터리로 보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옛날대로 살다간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원불교 여의도교당의 ‘법풍‘(法風)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즉각 어린이, 학생, 일반교도 전체를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실시했다. 여덟 항목을 제시하고 얻어낸 결과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뛴다는 것이고 둘째는 전 교도가 화합하고 단결한다는 거였다.
이 두 가지가 저 유명한 ‘여의법풍’(如矣法風)이다. 필자는 그 이후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뛴다”를 ‘인생을 보는 눈’으로 삼고 살아왔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제5편 ‘자로초견’(子路初見)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느 날 공자가 조카 공멸(孔蔑)을 만나 물었다. “네가 벼슬한 뒤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이냐?” 공멸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답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랏일이 많아 공부할 새가 없어 학문이 후퇴했으며 둘째, 받는 녹이 너무 적어서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공무에 쫓기다 보니 벗들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공자는 이번엔 공멸과 같은 벼슬에서 같은 일을 하는 제자 복자천(宓子賤, BC 521~445)을 만나 같은 질문을 해 보았다. 복자천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 글로만 읽었던 것을 이제 실천하게 되어 학문이 더욱 밝게 되었고, 둘째, 받는 녹을 아껴 부모님과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셋째, 공무가 바쁜 중에 시간을 내어 우정을 나누니 벗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공멸과 복자천! 이 둘은 같은 지위,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똑같은 수입을 가지고도 한 사람은 세 가지를 잃었다고 푸념하는데, 한 사람은 오히려 세 가지를 얻었다고 감사해 한다.
공멸과 복자천의 차이가 있다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결은 좋아하는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 나오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묘사한 글이 있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맹수에게 쫓기게 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치다 보니 가파른 낭떠러지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절벽 아래로 늘어 뜨러져 있는 넝쿨을 붙잡고서 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독사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다시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아래로 내려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나그네는 하는 수없이 잠시 동안 절벽 한가운데 매달려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나그네는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깜빡 잊어버린 채 손을 뻗어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이었다.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앞날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매몰된 인생을 향한 고발이다. 나그네를 보라. 죽음의 덫에 걸려있다. 죽을 운명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자기 앞에 있는 빨간 열매에 마음이 빼앗긴다. 자신의 재색명리(財色名利) 대해서만 관심을 지니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의 삶을 돌이켜보면 대개는 그렇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앞을 생각 못하고 산다. 배신과 음모를 밥 먹듯이 한다. 단견으로 인생을 보면 안 된다. 반드시 인과의 진리가 소소영령(疎疎英靈)하기 때문이다. 당장 힘들고 어렵다고, 지금 실패했다고 주저앉으면 안 된다. 지금의 실패도 긴 여정의 산을 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긴 안목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오늘 잘됐다고 오만하지 않으며, 지금 실패했다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삶이야말로 오직 인생을 통으로 그리고 진리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이 많으면 도리어 죄악을 짓게 하는 근본이 된다. 그래서 마음이 바른 뒤에야 돈과 지식과 권리가 다 영원한 복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 안목으로 인생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원(願)은 큰 데에 두고, 공(功)은 작은 데부터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