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대포무외’로 남남갈등 벗고 한반도 통일 이루소서”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불교 경전에 ‘대포무외’(大包無外)라는 말이 있다. 대포무외는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에 나오는 좌선의 경지로 “수행자의 심량(心量)이 넓고 커서 어떠한 중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포용해서 교화(敎化)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주보다도 더 커서 우주만유 전체를 다 마음속에 포용하고도 남는다. 우주 안에서 가장 큰 것은 마음이요, 가장 빠른 것도 마음이다.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를 역임하신 정산(鼎山) 종사는 <법어>(法語) ‘응기편’(應機編) 8장에서 “나이만 먹고 백발만 난다고 어른이 아니라, 남을 잘 용납하고 덕을 입히는 것이 어른이니, 남을 이기는 법이 강으로만 이기기로 하면 최후의 승리는 얻기가 어려우나, 부드러운 것으로써 지혜로이 이기면 최후에 승리하는 법이 있나니, 물이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로되 능히 산을 뚫는 것 같느니라”고 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도 이와 같다. 아무리 대국이라 하더라도 약소국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없으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천석꾼은 헝그리 정신으로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는 만석꾼은 없다.
2014년 중국은 이미 ‘PPP’(Purchasing Power Parity)로 보면 ‘구매력평가’에서 미국을 앞지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이 참으로 G-1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약소국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드를 빌미로 한국을 견제하고, 인구 14억의 대국이 인구 2만의 소국 팔라우를 관광객을 무기로 협박한다면 세간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 그가 갖고 있는 권력, 재력이 아닌 것과 같이 국격도 그 나라의 GDP나 국방력이 아니라 ‘대포무외’한 측은지심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럼 <휴휴암좌선문>에 나오는 ‘대포무외 세입무내’와 대포무외와 비슷한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뜻을 알아보자. 그야말로 우주를 품에 안는 대인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가를 더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대포무외다. 우주의 진리가 한없이 넓고 커서 모든 진리, 모든 법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수행자의 심량이 넓고 커서 어떠한 중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포용해서 교화한다는 말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주보다도 더 커서 우주 만유 전체를 다 마음속에 포용하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둘째, 세입무내다. 사람의 마음이란 펴놓으면 우주에 가득차고(大包無外), 좁혀 거두어들이면 바늘 한개도 들어갈 틈이 없다(細入無內)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의 성격이 매우 자세하고 치밀하여 바늘구멍만큼의 빈틈이나 허술함도 없이 치밀하고 세밀하다는 뜻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수행은 소승(小乘)으로 하여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은 널리 이해하고 용서하는 대포무외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셋째,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응당 텅빈 마음이 되어 경계(境界) 따라 그 마음을 작용하라는 뜻이다. 천만 경계를 응용하되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는 것이다. 어느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게 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로 무주심(無住心)·비심(非心)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금강경>의 한 구절로 육조(六祖) 혜능(慧能) 대사가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고 하여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텅 빈 마음, 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갖고 모든 경계를 작용하라는 뜻이다. 마음속에 선악(善惡)·시비(是非)·미추(美醜)·호오(好惡)·죄복(罪福)·부처와 중생·극락과 지옥 등 모든 선입관념을 놓아버리고 본래 심으로 천만경계를 응용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선입관념에 사로잡히면 곧 틀려버린다. 그러니까 일이 없을 때에는 분별심을 다 놓아 버리고 허공같이 텅 빈 마음이 되고, 일이 끝나면 그 자리가 곧 부처의 경지가 됨을 이르는 것이다.
한(漢)나라의 한신(韓信)이 젊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사장바닥에서 불량배들이 괜히 시비를 걸어왔다. “야! 임마!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서 지나가 봐. 그렇지 않으면 두들겨 패줄 테다” 한신은 잠시 생각해 봤다. 저 불량배들의 다리 사이로 기어가느냐 아니면 한 바탕 싸워보느냐? 한신은 스스로 생각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가. 더러워서 피한다고 했지’ 마침내 한신은 불량배들의 다리 사이로 기었다. 과연 한신은 비겁하고 못난 사람이었을까? 뒷날 한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량배들의 부당한 시비에 같이 맞서지 않고 오히려 축은지심을 가진 대포무외의 심경이 됐기 때문이다.
세상 살다 보면 정말 어치구니 없는 시비에 부닥칠 때가 있다. 특히 정의를 실천하려거나 이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만들려는 개혁주의자가 걸어가는 길은 의롭고 험난하다. 그러나 최후 승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의 편이다. 정의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부당한 권력이 대중을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억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진리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일시적 수난에 굴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