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나의 반야심경’ 홍사성 “가을, 양평 용문사 절 앞 늙은 은행나무”

저토록 푸르던 은행나무가 요즘 노란색으로 단장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1100년 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전란 등이 일어날 때 우는 소리를 내며 절과 마을과 착한 백성들을 지켜주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햇살 노란 가을, 양평 용문사 절 앞 늙은 은행나무

온몸 흔들며 <반야심경> 외운다

봄볕에 새순 틔워 이파리는 마른 가지 속에 들어 있다고

갈바람으로 우수수 낙엽지게 하고는 푸른 잎이 노란 잎과 다르지 않다고

한 뼘 노을에 정신 팔려 은행잎에 새긴 말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맡고 싶고 먹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

물구나무 서서 헛꿈 꾼 세월 참 길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린다

눈 뜨지 않아도 보이고 귀 대지 않아도 들린다

혹시 모르겠다,

이러다간 어느 날 갑자기 대나무 쪼개지듯 이목(耳目)이 열려

내 몸으로 하는 설법 내가 듣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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