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보름달 속에서 찾아야할 5가지

구름에 일부 가려진 보름달. 달 뒤편에 숨어있는 그 무엇을 상상해보며 2018년 추석을 맞아보자.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 캠프나비 대표]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문화 속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나 친족의 기존 틀에 가쳐 구속받고 자란 문화란 각인된 정신 프로그램이다.

기존 틀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문화결정론자’(White와 Spengler의 견해)라고 한다. 말하자면 고리타분하고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늘 같은 사고방식과 같은 모양새로만 사는 답답한 사람이다.

문화결정론 vs 문화자유론

반대로 자유롭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출해 도전적으로 사는 그룹을 ‘문화자유론자’(Kant와 Cassirer의 견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각하든 안 하든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형성된 의식세계는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일생 지배하게 된다. 이는 선택해서 결정한 것이 아닌 습관된 경험에 의해서 안주한 버릇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고 그렇게 형성된 자신이 본래 자신인 것으로 착각한다.

심리학자 Rogers는 “인간은 단순히 기계적인 특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무의식적 욕망의 포로도 아니고,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 중에 있다”며 “인간은 생의 의미를 창조하며 주관적 자유를 실천하는 존재”라고 했다. Moreno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으며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렇다면 자유론과 결정론 이 두 시각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두 가지 특성 모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달은 착각의 요술쟁이?

어느 보름 전날 밤이었다. 마당에 나가보니 밝은 달이 떠있다. 달 그늘쪽의 산은 칠흑, 반대편 산의 나무들은 달빛을 받아 그림 같았다. 먼 하늘의 별들은 반짝반짝 빛을 냈지만 달에 가까운 곳에 있는 별들은 빛을 잃고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움직임에 따라 내 그림자도 같이 움직이며 마당가의 매발톱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오랫동안 자세히 보니 문득 어둠과 하늘과 산과 별, 그리고 풀꽃의 존재양상이 보름달의 또 다른 표현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달과 서로 교섭하며 달빛에 따라 자신의 존재양상을 보여주었다.

달은 착각의 요술쟁이다. 달은 마치 자신이 빛을 내는 것처럼 연출하지만 태양에서 받은 빛을 반사시킬 뿐이다. 행성(혜성·유성·위성을 제외하고 태양이나 다른 별들 주위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물체)들도 마찬가지다. 행성들은 항성(천구상에 고정되어 있는 별로, 태양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고온의 가스체)들처럼 반짝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 달이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가 있다. 달은 자전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달 역시 우주의 모든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전을 한다.

달이 지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7일 7시간 43분, 그동안에 정확하게 한번 자전한다. 그래서 달은 지구에서 보았을 때 자전하지 않고 공전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붙박이 공전으로 인해 달은 항상 우리에게 같은 면만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구에서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우리 은하계를 구성하고 있는 약 1000억 개의 별들 중에서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수천 개에 불과하다. 이것은 별들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에 중심 따위는 없다

은하계 전체의 직경은 무려 10만 광년의 거리다. 하물며 지구나 인간은 이 우주공간에 비하면 지구상의 모래알 한 개보다도 못한 존재란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저 임의의 은하단 속에 있는, 임의의 평균적인 은하의 한 외곽에 있는 작은 태양계에 속하는 어느 작은 행성에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고, 세계에는 중심이 없다. 자연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겸허함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삶의 길을 간다. 때가 되면 다 같이 시들어 없어진다. 언젠간 모두 사라진다. 산길을 걸으며 나무와 들풀, 야생꽃을 보며 흙속에 뿌리 내려살아가는 그들과 인간의 삶의 두 마음을 본다.

책을 폈다. 하이데거가 말했다. “언어가 있는 곳에서만 세계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

나는 반기를 든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논리철학과 언어철학으로 우주와 자연계를 왜곡했다. 이 세상은 인간중심이 아니라 자연중심의 알 수 없는 궤적(軌跡)의 암호체계다. 지구나 인간 중심이 아니라 우주에는 달리 중심같은 것은 없다.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나

다시 또 생각하게 하는 우주의 수수께끼다. 세계는 착각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연력들의 정교한 일치를 모른 채 인간들은 마냥 허튼 말만 늘어놓고 사는 호모사피엔스인가? 자연은 단순하고 지극히 아름답다.

어떤 바보라도 사과 속의 씨는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씨 속의 사과는 자연만이 안다. 어떤 사과를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결국 우주를 알아야 한다.

살다 보면 해결방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고민거리로 괴로울 때가 많다. 개개인이 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때때로 충격적이며 놀랍고 뭉클하고 애잔하다. 나 역시 이로 인해 갈등한다.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 일상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떠올려보자.

우주, 자연, 자연계의 침묵, 인간의 자유의지, 문화자유론···.

당신이 올 추석 달 밝은 밤에 떠올린 것이 이런 것이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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