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일본 최악의 대지진, 아시아 위로와 지원

2011년 일본 열도 엄습한 미증유의 재앙

2011년 3월11일 오후 2시46분께 일본 미야기 현 센다이 동쪽 179km 지점의 산리쿠오키(三陸沖)해역에서 진도 9.0 규모의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의 대부분은 물론 홋카이도, 주에쓰 지방 및 나가노 현 등지에서도 강한 진동과 함께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쓰나미(Tsunami)’로 불리는 지진 해일이 미야기 현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을 강타, 더욱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지진은 미 지질조사국의 지진 규모 기준으로 최대였다. 또 근대 지진 진도 관측 이래 4번째,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였다.

지진과 쓰나미로 원자력 발전소도 폭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는 등 사상 초유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약 한달 뒤인 4월6일 사망자는 1만2000명, 실종자 1만5000명이라는 인명 피해 결과를 잠정 집계 발표했다.

아시아 각국은 일본의 재해에 진심 어린 염려와 희생자에 대한 애도, 지원의사를 밝혔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사고 2달 여 뒤인 5월21일 당시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차 방일,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시와 후쿠시마(福島)현 후쿠시마시 일대의 대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해 이재민들을 위로했다. 이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이튿날인 22일 ‘제4차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공동선언문과 부속문서를 채택했다. 3개국 정상은 최근 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위기를 진단하고, 원자력 안전 협력, 재난관리 협력, 재생에너지·에너지 효율성 제고를 통한 시속성장 협력 등 공동 협력방안을 채택했다.

북한은 사고 하루 뒤인 3월12일에 처음으로 논평 없이 사고를 보도했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은 “러시아는 일본이 비극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며 “사망자의 유족들에게 진실한 애도의 뜻을, 그리고 부상자들에게는 위안의 말을 전해 달라”고 표명했다.

중국 원자바오 총리는 “중국 정부를 대표해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내용의 전보를 간 나오토 총리에게 보냈다. 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전했다.

대만의 마잉주 당시 총통은 “일본 측의 요청을 받아 바로 구조대를 출동시키고 일본 정부가 요청하면 대만 국제긴급원조대를 언제든 출동하도록 대기시켰다”고 밝혔다. 당시 마잉주 총통은 “일본이 1999년 9월 타이완 섬 중부 대지진과 작년 8월 남부 태풍 피해 당시 대만을 지원해주었다”며 “우리들도 똑같이 일본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 밝혔다.

2010년 한국의 스님 법정 입적

2010년 3월11일 한국의 불교승려이자 수필가인 법정(法頂, 본명 박재철,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 출생)스님이 입적했다. 세속 나이 79세, 법랍 54세.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온 정신적 지도자가 열반에 든 것이다. 스님의 마지막 직책은 서울 성북동 길상사 회주였다.

스님은 한국의 광주광역시 소재 전남대학교 상대 3년을 수료한 뒤 24세 때인 1956년 경남 통영시 미래사에서 효봉(曉峰)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59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5대 총림의 하나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 조계총림의 문을 연 구산 스님, 송광사 회주인 법흥 스님, 환속한 시인 고은 씨 등과 사형사제 간이다.

경남 합천 해인사, 경남 하동군 쌍계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 수련원장 등 종단 소임을 몇 차례 맞았을 뿐이며, 수행자로서 본분에 충실했다. 1994~2003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회주를 맡기도 했다.

1976년 처음 나온 밀리언셀러 산문집 ‘무소유’를 비롯해 ‘서있는 사람들’ ‘산에는 꽃이 피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

1983년 파키스탄 플루토늄 핵실험 성공

1983년 3월11일 파키스탄은 키라나 힐즈(Kirana Hills)에서 플투토늄 핵분열장치 폭발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폭발실험에 쓰인 고순도 플루토늄 10kg은 파키스탄 핵과학기술연구원(Institute of Nuclear Science and Technology)에 설치된 10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원자로는 1960년대 중반 미국이 파키스탄에게 제공했으며, 1974년부터 가동됐다. 1989년 이 시설을 개량했다. 핵과학기술연구원 원장 무니르 칸은 자체 제작한 또 다른 흑연감속로를 그 연구원에 설치했는데, 두 번째 원자로는 1974년 1월21일부터 가동됐다.

파키스탄은 당초 <프로젝트(Project)-706>이라는 암호명으로 우라늄 핵개발과 플루토늄 핵개발을 동시에 추진해왔다. 카디르 칸의 명성과 함께 우라늄 핵개발만 알려졌을 뿐이고 플루토늄 핵개발은 알려지지 않았다. 우라늄 핵개발을 이끈 핵과학자는 카디르 칸이고, 플루토늄 핵개발을 이끈 핵과학자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Munir Ahmad Khan)과 사마르 무바락만드(Samar Mubarakmand)다.

1999년 하타미 이란 대통령, 교황 방문

1999년 3월11일 이슬람 국가 대통령 하마티가 바티칸 로마 교황청을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났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지도자가 서방 국가를 방문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십자군 원정 이후 900여 년 묵은 이슬람과 가톨릭간의 반목을 풀기 위해서다.

교황의 서재에서 25분 동안 이뤄진 만남에서 교황은 “오늘은 앞날에 희망을 주는 중요한 날”이라고 말했다. 하타미는 “다음 세기는 칼이 아닌 대화의 세기로 만들어 나갑시다”라고 화답했다. 또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 간에 평화와 화해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위기에 빠진 이란 경제에 탈출구를 마련하고자 이탈리아 방문에 나섰던 하타미 대통령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20억 달러의 투자도 약속받았다.

사회적, 정치적 자유의 신봉자로 자처해 온 하타미 대통령은 앞서 이슬람등 여타 문명과 서구문명간의 불가피한 충돌을 예고한 샤무엘 헌팅턴 교수의 <문명충돌론>을 반박하면서 이슬람문명과 기독교 문명간의 화해를 통해 서구와의 대결에서 탈피, 대화의 주창자로 나설 것임을 밝힌 바 있다.

하타미대통령은 이슬람식 민주주의를 기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강경파 종교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의 견제속에서 과거 지도자들의 고립?강경 일변도 외교에서 탈피, 서방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조심스럽게 추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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