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0일] 안창호 선생, 동학교주 최제우 선생 영면

2009년 티베트 봉기 50년

1959년 3월10일 티베트 라싸(拉薩)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인 노불링카 주변에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부터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곧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맞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봉기로 전개됐다.

폭력사태를 우려한 달라이 라마는 군중들에게 해산할 것을 촉구하고 중국에는 폭력진압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진압이 불가피함을 깨달은 달라이 라마는 3월17일 저녁 라싸를 떠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무력진압했다. 3월 28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티베트 정부 해체를 발표했고, 달라이 라마는 즉각적으로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부인하는 성명을 내놨다.

중국은 이 봉기를 진압한 뒤 티베트를 강제로 개조하려 했다. 귀족과 사찰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인민공사 방식을 도입했고, 티베트 불교에서 거행하는 공공 집회를 완전히 통제했다. 이 사건 직후 인도에 세워진 티베트 망명정부는 독립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2009년 3월10일 티베트 봉기 50주년을 맞아 지구촌 곳곳에서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티베트인들이 중국에 대항하여 티베트의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선포한 ‘3월10일’을 ‘티베트의 날’로 기념해왔다.

 

1945년 미군 B-29기 도쿄 대공습

1945년 3월10일 새벽 0시 직후 ‘도쿄 대공습’이 시작됐다. 사이판 미군기지를 이륙한 B29 폭격기 300대(일부 언론 340여대)가 약 두시간반(일부 언론 약 6시간)동안 도쿄를 초토화했다.

미군기는 도쿄 동부 스미다가와강 주변의 아사쿠사와 후카가와 등 목조주택 밀집지역에 소이탄을 무차별로 쏟아부어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투하된 소이탄(네이팜탄)은 약 1700t(일부 언론 2400t)으로, 때마침 북서풍이 불어 불길이 드세게 번져나갔다. 불에 타 숨지거나 불을 피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하는 등 이날 사망한 사람이 8만3000여 명(일부 언론 8만4000명)이며, 행방불명자와 부상자 등 100만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미군은 일본의 목조주택을 효과적으로 불태우기 위해 글리세린과 가솔린을 혼합해 만든 고성능 소이탄을 개발해 사용했다.

이날 공습은 몇 개월 뒤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이어졌다.

당시 도쿄는 23년의 간토 대지진으로 이미 한 차례 초토화된 뒤였다. 공습을 주도한 미 육군항공대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일본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르메이는 미군 자체 사망도 높였던 저고도 전략폭격 작전을 구사했다. 미군 조종사들이 르메이에게 무리한 작전이라며 항의를 했는데, 르메이는 “10만 명을 죽였으니 대성공”이라며 꿈쩍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다. 일주일 안에 일본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실제로 단 엿새 만에 일본의 대도시들이 거의 불탔다. 르메이는 남태평양 보급기지에 비축해둔 폭탄을 모두 쓴 뒤에야 일본 폭격을 중단했다.

진정한 반전은 일본 정부가 1964년 전후 자위대 창설·훈련에 기여한 공로로 르메이에게 최고훈장을 수여한 것. 그 뒤 2005년에는 당시 ‘도쿄 대공습’ 60돌을 맞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법회가 열렸고, 전쟁의 참상을 되새겼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1938년 한국 독립운동가 안창호 사망

1938년 3월10일 밤 12시 구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께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60세. 조국 광복을 불과 7년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성리 도롱섬에서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부터 사당에 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는데 16세 때 두세살 위인 필대은이란 청년 선각자를 사귀게 되어 세계 정세와 나라일에 크게 눈뜨게 됐다.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등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본 그는 힘없는 나라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애국의 뜻을 키우게 됐다.

도산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해 초창기 임정의 기반조성에 주력했다. 1923년 임정내부의 분열을 수습하고 민족운동의 통합과 임정개조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으나 창조파 등 좌익의 반대로 실패한다. 1926년 독립운동의 역량을 통합시켜보려고 중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창립을 선도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 경찰에 체포, 서울로 압송된 도산은 4년형을 받고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돼 고초를 겪으면서 중병을 얻어 보석, 입원 중 일생을 마쳤다. “목인(일본 명치천황의 이름)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다” “낙… 심… 마… 오…” 이것이 도산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1864년 동학 창설자 최제우 처형

1864년 3월10일 동학 창설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년12월18일생) 선생이 대구에서 효수형으로 처형됐다.

경주의 몰락한 양반 후손 출신으로 어릴적 성리학을 공부한 그는 조선왕조에 대한 비판의식과 유교와 불교, 선교의 장점을 융합,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는 시천주 사상을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1860년대 초 영남과 호남은 물론 충청도와 경기도까지 교세가 급속도로 확대됐다.

천주교의 한 파로 탄압받다가, 1863년 11월 경주에서 사악한 가르침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사도난정)는 죄목으로 체포돼 이날 대구에서 효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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