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일왕이 자결 못한 건 사무라이가 아니었기 때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히로히토가 자결을 하지 못한 것은 무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는 항상 죽음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명예스럽게 죽느냐를 생각하지만 일왕(덴노)은 사무라이가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에서도 중국과 같이 천황天皇으로 써달라고 한다. 하지만 덴노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천황이라고 써줄 수는 없다. 사무라이는 처형을 당하느니 자결을 하도록 허용해달라고 애원하며 이것이 허용되었을 때는 이를 은혜로 받아들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에서 전군이 전멸할 때 군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는 참모장 조오 이사무에게 가이사꾸를 부탁하고 배를 갈랐다. 둘 다 만주사변 이래 수많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죽인 자여서 죽음도 이에 어울리게 비장하게(?) 꾸몄다. 그런가 하면 항복 후 도오조 히데키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여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키나와는 1876년 일본에 병합되기 전까지 독립왕국이었다. 중국의 번국이었다고 하나 이는 중국의 세력권이라는 것이지 중국의 영토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나 이는 당시의 동아시아의 질서에 따른 외교정책이지 국체를 유지한 독립국이었던 것과 같다.

1945년 9월27일 일본 도쿄 미 대사관에서 맥아더를 만난 히로히토 일왕.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남경학살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 군국주의자들은 역사와 진실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차단시켰다. 그런가 하면 전후세대는 <대망>(大望)이나 <언덕 위의 구름> 등에 열광했다. 남의 나라 애국주의 교육에 간여할 바는 아니나 이것이 인근의 비극을 조장함에 이르러서는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는 나치의 하이겐 크로이츠와 같이 공중에 들고 나오는 것을 철저히 금했어야 했다. 일억참회(一億懺悔)는 일본 국민 모두가 책임을 다같이 지자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독일이 나치를 처단하고 불란서가 나치 부역자를 가려내듯이 시비를 가렸어야 했으나 전후 일본을 끌어온 요시다 시게루를 비롯해 조선, 만주를 경영하면서 중국을 침략하던 무리들의 후계였으니 이는 처음부터 無望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미국, 특히 맥아더 장군의 책임이 작지 않다.

불철저한 역사인식과 정리는 비극을 잉태한다. 한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에 전승국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광복군이 국내로 진공하기 전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가 차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서 이 문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였다. 독도 문제는 이로부터 유래된 것인데 일본은 이를 근거로 논의하자고 나오는 것이다.

일본이 1차대전의 승전국의 일원이었는데도 영국·미국·프랑스로부터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일본 외교관들은 이때의 충격을 교훈삼아 그 후 열심히 실력을 쌓기에 열중하였다. 따라서 일본 외교관들은 적어도 4반세기 이상 한국 외교관들에 앞선다.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 말고도, 한국의 외교관과 국제법 학자들이 혹시 일본 외교의 실력을 어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냉정하게 살펴볼 일이다.

외교를 뒷받침하는 것은 군사력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를 챙기는 것은 외교력이다.

마찬가지로 5·16에 대한 평가와 10월유신은 구분해야 한다. 5·16의 긍정적인 면을 평가한다고 하여 10월유신까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하다 못해 3선을 위해 국민투표를 거친 최소한의 잘차도 무시한 것이었다.

10월유신이 중화학공업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 자들까지 생겨났다. 3선을 하면서 김대중에 대한 귀찮은 생각이 극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김대중에 지지는 않겠지만 이런 번잡한 짓을 꼭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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