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엮고 풀어쓰며 보태다···‘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한반도에 폭염이 시작된 7월 중순, 기자는 동유럽 여행길에 나서며 책 두권을 가방에 챙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이다. 부제 격으로 ‘김형오 엮고 풀어쓰며 보태다’가 붙어있다.

고교 시절 국어선생님은 고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읽지 않았어도 줄거리가 눈에 훤히 들어오는 책”

<백범일지>가 바로 거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일종의 <백범일지> 해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전직 국회의장으로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있는 저자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글쟁이’라고 나는 평가한다.

그의 글은 우선 쉽고 간결하며, 치밀한 팩트 확인을 거쳐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에 와닿는다. 그의 앞서 책 <술탄과 황제>가 좋은 사례다.

내가 좋아하는 책읽기 방식은 정보와 느낌이 있는 대목에 밑줄을 긋는 것이다. 볼펜보다는 연필을 주로 사용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밑줄 치는 대상 가운데는 문장이 많지만, 단어나 숫자, 사진설명, 각주 등도 포함된다.

이렇게 책을 읽다보면 시작해서 마무리까지 지루하지 않을 뿐더러 재독, 삼독 때 밑줄 그어진 페이지는 물론 앞뒤 줄거리도 기억이 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아, 백범. 내가 정말 몰랐던 김구” 이런 탄식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러시아월드컵 결승전이 벌어지던 날 오후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를 벗어날 즈음이었다.

나는 책 머리로 돌아와 밑줄 그어진 단어들과 문장들을 다시 더듬어본다. 동시에 백범과 김형오의 숨결이 스며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중 나에 의해 밑줄이 그어진 대목들을 소개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인다’는 협박에 ‘죽겠다’고 저항했다. (23쪽)

환경은 처절했고 심정은 절박했다. (25쪽)

천만다행히도 사형 집행을 사흘 앞두고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개설되는 바람에 임금의 지시가 감리사 이재정에게 극적으로 하달될 수 있었다. (29쪽)

휘호로 즐겨 쓴 ‘답설야중거’는 서산대사의 선시인 줄 알았으나,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의 한시였다. (45쪽)

공식 개명은 ‘창암’ ‘창수’ ‘구龜’ ‘구九’ (49쪽)

나는 1876년 7월11일(양력 8월29일) 자정 무렵, 텃골 웅덩이 큰집에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산통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기가 나오지 않아 산모의 생명이 위험했다. (61쪽)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65쪽)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설명은 채 듣지도 않고 오히려 꾸중하시면서 빼앗은 회초리로 한참 동안 아버지를 때리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고마웠고, 매 맞는 아버지 모습을 보니 퍽 시원하고 고소했다. (67쪽)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운명하실 때 왼손 약지를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흘려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내가 태어났다. (70쪽)

비겁하게, 연약하게, 방탕하게, 나쁘게 살도록 가르치는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 (73쪽)

생신날이 되자 어머니는 그 돈에 당신 돈까지 보태 권총을 사 왜놈들을 처단하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76쪽)

어렵사리 국경을 넘어온 당신을 헤어진 지 9년만에 절강성 가흥에서 상봉했을 때 하신 첫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말로 꾸짖을 뿐 회초리를 들지 않겠네.” (81쪽)

“가엾은 것! 여섯 살 어린 것이 뭘 안다고 죽어가면서도 자기 죽음을 너한테는 기별하지 말라더구나.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어요’하면서 말이다.” (89쪽)

돌아가신 뒤에도 당신은 매장지 인근에 먼저 묻힌 수십명 한인 동지들의 ‘지하회장’ 노릇을 하시리라 느껴졌다. (91쪽)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혁명가의 가족에게 고난과 시련은 숙명이었다. (93쪽)

폐병을 앓던 남편 인을 위해 며느리가 마지막 실낱같은 기대로 폐니실린을 구해달라 했을 때 “그 병을 앓다가 죽은 동지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 아들만…”하며 거절했다는 백범. (94쪽)

석사: 벼슬 없는 선비를 높여 부르는 말. (114쪽)

안중근을 비롯해 세 아들을 모두 애국지사로 길러낸 안태훈. (116쪽)

맏아들 중근, 둘째 정근, 막내 공근이었다. (118쪽)

한번 인연을 맺으면 여간해선 잊지 않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128쪽)

일을 할 때는 판단-실행-계속의 3단계로 성취해야 한다. (135쪽)

친청 봉건적인 고능선과 진보 개혁적인 안태훈도 그렇게 갈라섰다. (138쪽)

그래, 벼랑에 매달려 나뭇가지를 잡은 손마저 놓는 자라야 장부라지 않았더냐. (141쪽)

김구의 탈옥 과정을 살펴보면 대담하고 치밀하다. 또 그가 얼마나 의리를 중시하는가를 알 수 있다. (160쪽)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이라 지어 불전에 아뢰었다. (164쪽)

도망자가 되어 유랑할 때도 내겐 알게 모르게 영웅심과 공명심이 남아 있었다. 중이 되고 보니 그런 허영과 야욕이야말로 부처 문중에선 털끝만큼도 용납이 안 될 사악한 생각일 따름이었다. (166쪽)

‘칼’은 백범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인가. 피 묻은 칼을 씻고자 찾아온 그를 ‘칼을 찾는 집’이 맞이한다. 물질의 칼이 아닌 마음의 칼을 찾으라는 뜻이리라. (169쪽)

백범처럼 맑고 넓고 열린 가슴에는 낡은 봉건적 사고와 편협한 볼셰비즘이 수용될 수 없었다. 그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좀 더 일찍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189쪽)

“창수는 범상이라 장차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 세상을 놀라게 할 인물” (190쪽)

스물일곱 살(1902년) 정월, 먼 친척 할머니에게 세배를 갔다가 혼사 걱정을 하시는 할머니께 결혼 조건을 말씀드렸다. “첫째, 재산을 따지지 말 것. 둘째, 학식을 갖출 것. 셋째, 직접 만나 서로 마음이 맞는지 알아볼 것. 이 셋을 만족시킬 여자라면 아내로 맞으렵니다.” (192쪽)

1906년 63개에 불과했던 정부 인가 사립학교는 1910년 7월엔 2,237개로 늘어났다. 미인가, 미신고 학교까지 합하면 5천개에 이를 정도였다. (207쪽)

내 혀끝에 사람 목숨이 달려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자고 거듭 다짐했다. (227쪽)

태산처럼 커 보이던 일제가 겨자씨만큼 작아 보였다. (230쪽)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되,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선별 채택해 적용하면 국가에 이롭겠구나! (234쪽)

“훗날 우리나라가 독립한다면 인품과 자질을 갖춘 이를 간수로 채용해 죄인도 국민의 한 구성원으로 보아 선한 마음으로 지도하고, 사회에서도 전과자라 멸시하지 말고 학생처럼 대우할 때 비로소 감옥을 설치한 의미와 가치가 있으리라.” (240쪽)

왼쪽 귀의 연골을 심하게 맞아 내 귀는 짝짝이가 되고 말았다. (243쪽)

당시 나는 맏아들 인마저 고국의 어머니께 보내고 혼자 외로이 그림자와 짝해 살던 처지였다. (278쪽)

진실과 진심은 역시 통했다. (282쪽)

임시정부 생활 20여 년 동안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다 스러져간 수많은 대가족이 있다. 그중 몇사람 이름을 불러본다. (292쪽)

이봉창은 나보다 스무 살 넘게 아래지만 ‘선생’이라는 존칭이 절로 나왔다. (304쪽)

약소국의 초라한 늙은이를 위해 가파른 산길을 땀으로 목욕하다시피 힘겹게 넘어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도피를 도운 저 여인의 숭고한 인류애와 희생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고 싶어서였다. (336쪽)

가흥에 있던 주애보를 남경으로 데려와 회청교 부근에 방을 얻어 동거를 했다. (338쪽)

간디의 자서전도 솔직한 고백으로 인해 자주 거론된다. 간디는 매춘부와 동침한 경험을 비롯해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욕정을 못 이겨 옆방에서 부인을 품에 안다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들을 고해성사하듯 쓰고 있다. 물론 김구의 경우 간디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을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341쪽)

혁명가의 삶은 고달팠다. 공초 오상순의 표현을 빌리자면,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인생이었다. (350쪽)

비행기는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고국의 냄새를 맡았다. 떠난 지 26년7개월여 만의 귀환이었다. (388쪽)

“요즘 같은 세상이야말로 백범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 아닌가요?” (392쪽)

**후기:위의 밑줄 친 대목들을 저자에게 카톡으로 보냈더니 다음의 답이 왔다.

“이형 꼼꼼히 읽어주어 너무 고맙소 잘꿰어 활용하시고 인생경륜에 보탬이 되시기를!!
다만 오탈자가 두군데 있군요 1906년 63개에 불과했던 정부 인가 사립학교는 [1970년->1910년] 7월엔 2,237개로 늘어났다. 미인가, 미신고 학교까지 합하면 5천 개에 이를 정도였다. (207쪽) [주해보->주애보]를 남경으로 데려와 회청교 부근에 방을 얻어 동거를 했다. (338쪽) 내 책 받은이 중 이형만큼 제대로 읽은 이가 많지 않을 것 같네요. 복중 더위에 수고많았습니다.늘 건강하시기를^^”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