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퇴임사와 ‘재판거래’ 의혹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요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대의 법운영이 도를 한참 넘은 것 같아 우리네 서민들은 무얼 믿고 살아야 하는지 걱정이 든다.

법이란 바로 ‘도리(道理)’다. 반드시 사람이 지켜야 할 준칙(準則)이 아닌가? 우리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이러한 것들을 보장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정의롭고 안정된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앞에선 ‘독립’을 외치고, 뒤에선 대통령과 ‘거래’를 서슴지 않았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제 어느 국민이 재판을 전적으로 신뢰할까? 사법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재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시절 자행했다는 몇 가지 사례를 보자. 2008년 KTX 해고 승무원 34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1심과 2심에서 승소했지만 2015년 대법원에서 이를 뒤집었다. 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2010년 제기한 소송이 1심에선 패소했지만 2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는데도 2014년 대법원이 최종 판결에서 이를 뒤집었다.

그 외에도 특별조사단은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양 전 대법원장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410개의 파일 중 일부만 공개한 파일에는 ‘BH(청와대) 민주적 정당성 부여방안’, ‘조선일보 첩보보고’, ‘대한변협 압박방안 검토’, ‘VIP(대통령) 거부권 정국분석’, ‘하야 가능성 검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파일들은 제목만으로도 대법원의 정상적 사법행정과 상관없이 당시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등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법관은 절대적인 존재다. 민사사건이거나 형사사건이거나 모든 분쟁의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법관의 판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관의 판결은 지극히 공정해야 한다. 법치국가라 할 수 없는 조선시대에도 이 점을 매우 중시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런 말을 했다.

“판결의 요체는 밝게 살피고 신중히 생각하는 데 있을 뿐이다. 사람의 생사가 나 한 사람의 살핌에 달려 있으니 밝게 살피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사람의 생사가 나 한 사람의 생각함에 달려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법적 판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다산은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도 이를 더욱 강조했다. ‘欽欽’은 <서경>(書經)의 “조심하고 조심하여 형벌을 신중히 했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에서 따온 말이다. 사법적 판결이 이렇듯 중요하기 때문에 법치국가에서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하여 사법부를 행정부, 입법부와 독립시켜 외부의 간섭 없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재판의 역사는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1958년 간첩죄로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 사건과 1975년 긴급조치 위반과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된 도예종, 여정남 등 인혁당재건 사건이다. 이들은 2011년과 2007년 재심에 의하여 모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비록 이들의 명예는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그 억울한 죽음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이밖에도 무수한 ‘사법살인’이 자행되어온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중하지 못하고 공정하지 않은 판결에 의한 참사이고, 사법부에 대한 독재권력의 부당한 간섭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평번’(平反, 평반이라고도 발음함)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다산은<목민심서>에서 “평번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선(善)한 일이요 덕(德)의 바탕이다”라 말했다. 일반적으로 형벌을 경감해 주는 것이 평번의 취지이기 때문에 다산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재판거래 의혹은 다산이 “천하에서 가장 선한 일이요 덕의 바탕”이라고 한 평번의 취지에는 어긋나는 게 분명하다. 대법원 판결에 행정부와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하면 나와 같은 힘없는 사람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재판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양승태 전 대법관은 작년 9월 22일 퇴임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의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 “법관은 어떠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재판의 독립을 지켜야 할 헌법적인 의무와 책임이 따릅니다.”

대의(大義)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살아도 가치 없는 인생이요, 죽어도 값없는 죽음이다. 양심(良心)을 굽혀 형세에 따르는 이는 혹 일시의 보신(保身)은 된 듯하나 도리어 만년의 치욕은 면치 못하게 된다. 대법원장까지 지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거래의 말로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참으로 연민(憐愍)의 정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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