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3주년] 백범 김구 주석님에게 드리는 편지
[아시아엔=조희환 한국외대 명예교수(중국어과)] 존경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 어르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또는 주석 직을 번갈아 담당하면서 풍찬노숙을 다반사로 감내하던 거룩하신 애국지사님을 무어라 호칭해야 할지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얘기에 바빠서 호칭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뒤로한 채 습관대로 ‘주석’(主席)님이라고 부르면서 편지를 드릴까 합니다.
제가 주석님을 간접적으로라도 처음 접한 것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편집하고 동명사(東明社)에서 6판째 발행한 <백범일지>라는 책을 1960년 6월 27일 당시 가격 500환(?)을 주고 구입하여 읽으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서거하신지 11년 뒤의 일이군요.
저는 대학생 시절에 다른 수많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4.19의거에 열렬히 참여했고 그 일로 해서 4.19학생단체에서 일부분 책임을 맡아 꽤나 바쁠 때였으나 그 한권의 책은 밤새워 탐독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의심되는 사람이면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을 말라”는 말씀이 생각나고, 또 당시 일제 침략군 장교를 온몸으로 제압하여 처단하신 활극같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동시에 친일파에 대한 혐오감도 나고요.그리고 특히 ‘문화국가’를 예찬하신 말씀은 반드시 발양하고 계승해야 되는 ‘국운’(國運)의 문제로 보고 저의 연구과제로 놓여져 있습니다.
주석님을 위시한 독립투사들의 현지생활의 춥고 배고픔은 거지만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중국인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겠지만 남의 땅에서 신세지는 처지에 감지덕지 참아야 했겠지요. 억울하고 분한 것은, 일제에게 놀아나거나 어리석어서 일제의 앞잡이 군인이나 스파이가 되어, 때로는 한인을, 때로는 중국인을 학살한 망나니 동족들 때문에 가슴 아팠을 것임을 익히 짐작합니다.
일제 주구들의 잔인하고 간악한 모습에 울분(鬱憤)을 풀어볼까 하여 저명한 애국지사의 후손이신 이아무개님에게서 들은 의미깊은 풍자시 한수를 외워보겠습니다 :
去年煮犬 今年太 작년에는 보신탕을 끓여 먹었는데 금년에는 콩밥을 먹는 구나
大字一點 何上下 ‘큰 대’자에 점하나 어찌하여 위에도 붙고(犬) 아래도 붙나(太)
非倭似倭 甚於倭 왜놈도 아닌 것이 왜놈 같으면서 왜놈보다 심하구나
以鮮打鮮 死者鮮 조선 놈으로 조선 놈을 치니 죽는 놈은 조선 놈이로구나
백범 어르신의 <백범일지> 마지막 부분에 기술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말씀은 저에게 평생의 과제를 남겨주셨습니다.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직접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이십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저는 이 말씀에 99% 공감합니다.
첫째, 부력(富力) 또는 경제력은 많을수록 좋을 것 같으나 평균수준의 의식주만 해결이 되는 정도라면 될 것으로 저도 생각합니다. 물욕은 한이 없어서 자칫하면 물욕의 노예가 되어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요즈음 ‘1%의 부자 대 99%의 가난뱅이’라고 떠듭니다. 그런데 이 계산 속에는 금융업자 이외에도 그에 버금가는 알짜 부자들(약 9%)이 많은데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랍니다. 따라서 이 말은 ‘10% 부자 대 90% 가난뱅이’가 더 맞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웅 간디는 “노동없는 부는 죄악”이라 했습니다. 무위도식하고 멋대로 향락하면서 남을 깔보며 으스대는, 그러면서 속으로는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물욕이 너무 심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강력(强力) 또는 무력은 자위력을 갖추는 정도면 될 것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3국에, 또 때로는 어떤 해양대국까지 포함한 4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의 기본체력(인구, 국토, 자원, 기후 등)은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통념을 넘어 겨루어볼 만한 나라로 만들 수가 없지는 않겠지요. 우리의 경제력을 몽땅 군사력 강화에 쏟아 붓고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시킬 터인데 그게 좋을까요? 또 잘못하면 대국 간의 전쟁놀이에 앞잡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침략한바 있고, 일제 때 일부나마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침략에 이용된 바 있지 않습니까? 제 생각 같아서는 중립국이 되어 독자성, 주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어느 한 강대국의 사냥개 노릇을 피하면서 독립을 누릴 수 있겠기에 말입니다. 이 논의는 4.19혁명 직후에도 상당히 심도있게 거론된 바 있습니다만 애석하게도 1961년 5.16쿠데타 정권이 박살을 내버렸지요.
셋째, 자연과학은 물론 발달할수록 좋을 것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지나친 발달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나 기계는 도덕적으로 중립입니다만 사용자에 따라서 악용하여 병도 되고, 선용하여 약도 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원자력은 전력으로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폭탄으로 쓰면 독이 되지요. 자동차나 다른 편의용 기계들도 적당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의지하면 신체가 약해지거나 사고로 인해서 갑자기 불구자가 되거나 성인병에 걸립니다. 더욱이 기술이 좋답시고 온 국토를 ‘골프 군(郡) 러브호텔 면(面) 가든 리(里)’로, 또 아름다운 산하를 빌딩이나 고속도로 또는 위락시설로 가득 채우면 천혜의 자연은 어디에 남게 됩니까? 자연을 망친 그만큼 우리의 자신과 후손들이 병들게 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위도 상으로나, 육해 상의 위치로나 정말 선조님들께서 잘 잡아주시고 지켜주신 명당입니다. 그래서 지덕체 어느 면으로나 훌륭한 인재들을 계속 배출해줄 땅입니다. 목전의 편의를 자랑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할 일까지 미리 땅겨서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망치는 철부지 짓은 제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백범 선생님, 생존해 계신다면 그 넓으신 아량과 깊으신 인문 지식을 몇날 밤낮을 지새우면서 묻고 배우고 싶은 심정입니다만…..이만 아쉬움을 묵념으로 대신합니다. 어린 이 백성들을 늘 살펴보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