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쓴 최인훈 주인공 이명준 따라가다
[아시아엔=김국헌 군사학박사] <광장>은 최인훈의 대표적 장편소설로 1960년 나왔는데, 구 정권 하에서라면 감히 다루지 못하고 터부시되었던 남·북의 대립을 정면으로 파헤친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으로 탈출해온 철학도다. 그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민족의 비극을 깨닫는다.
그의 생활은 안일과 권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가 월북한 것은 ‘인간적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광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북한 역시 퇴색한 구호와 기계주의적 관료제도만 있을 뿐이었다. 전쟁포로가 된 그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한 것은,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던 처절한 안간힘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투신자살하고 만다.
끝없는 좌절과 뚜렷한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그의 절망감이 초래한 것이다. 분단이 고정되기 전, 1948년 중반까지는 북한을 찾아 38선을 넘은 인텔리들이 적지 않았다. 김일성이 평양에서 도주할 때 유엔군이 노획한 자료 가운데는 김일성대학교 교수 자력 명부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일본은 물론, 독일에서 유학한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처럼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있었고, 마땅히 서울대학교 공과대 교수로 건국의 초석이 되어야 할 인재도 적지 않았다. 주인공 이명준은 이때 북으로 간 인텔리를 표상한다. 6·25전 초기 북한군은 중국에서 항일전쟁에서 단련된 정예부대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참전하고 국군의 지연전이 성과를 거두어 구축된 낙동강 전선을 형성한 이후 이를 돌파하기 위해 김일성은 북한에서 사단을 급조하는 한편 남한에서도 수많은 의용군을 동원하였다. 북한군의 8월 공세, 9월 공세에서 미 공군의 융단폭격과 국군과 유엔군의 선전으로 이들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이명준이 포로가 된 것은 이때다. 이명준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하다가 자살하고 만 것은 주체사상의 설계자 황장엽이 대한민국에 귀순하였으나, 남쪽 정부에서 뚜렷한 전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에 이른 것을 연상시킨다. <광장>의 이명준처럼 황장엽에게는 딛고 설 광장이 없었던 것인가? 최인훈의 <광장>은 4·19혁명으로 완강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무너진 틈을 타고 그때까지 상상도 못하던 시도를 한 것이다.
최인훈의 대표작이 된 것도 그가 던진 이 무게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와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시대적 상황이 이를 용인하였을 뿐더러 전라도 사투리의 문학적 흥취와 조정래의 재간 넘치는 구성이 상품으로서는 1960년대의 <광장>을 넘어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55년전 최인훈의 <광장>이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광장>은 남북 분단에 처한 지식인의 고민은 정치·전략적 분석 이전에 철학·문학적 추구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선우휘의 <불꽃>을 읽기 전 우리는 먼저 1차세계대전을 떠올려야 한다. 1918년 11월11일 11시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총성이 멎었다. 영국인은 11월에는 당시 전장인 프랑드르 평원에 피어 있던 양귀비꽃을 단다. 전쟁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을 추념하기 위해서다.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한 솜므 전투에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고 공격개시 30분 만에 5만명의 꽃이 흐트러졌다(散華).
옥스퍼드, 캠브리지의 귀한 정령(精靈)들이 한낱 기관총 밥이 되어 스러져갔다. 1차대전에서 영국은 200만, 프랑스는 380만의 젊은이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백년 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 경영으로 긁어모은 재화를 탕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자산 즉 수백만의 젊은이를 잃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으로서 영국과 프랑스는 몰락했다.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터키는 아예 제국이 없어졌다. 1차 세계대전을 당시에는 ‘Great War’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왜 싸우는지,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몰랐다. 1차대전 당시에는 젊은이가 불과 수십 발의 기관총탄과 목숨을 바꾸어야 했다. 1차대전에서 전쟁의 참화에 몸서리쳐 병기와 전술이 발전된 2차대전 당시에는 한 명의 병사를 사살하는 데 드는 소총탄은 10만발이었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부모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인 한 젊은 병사가 죽어가고 있는 전선을 후방의 최고사령부에서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한 구절로 처리하는 상황을 그려 전쟁의 처절함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문학의 최고 걸작이다.
역사가 밖에서 담담하게 전쟁을 그려내고 있다고 하면, 문학은 백병전에 섞여서 피가 솟구치듯이 생생하게 그려낸다. 선우휘는 전후 문단에 있어서 가장 발랄하고 선이 굵은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북 정주 출신으로 월남하여 전선에 서있던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이었다. 1957년 발표되어 동인문학상을 받은 단편 <불꽃>은 3·1운동으로부터 6·25까지 한민족의 일그러진 반세기를 점철하고 있다.
작가는 두 개의 인간형을 제시해놓고 그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과도기의 인간을 그리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강골을 과시하던 선우휘의 후반은 <불꽃>처럼 살아가는 분단 아래 지성인의 한 전형이기도 하였다. 한 평론가는 “1950년대의 ‘전후문학’은 기성 가치관의 상실, 전쟁의 참혹성과 불안, 극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고뇌의 몸부림이었다. 1950년대 전후문학은 1980년대까지 그 잔영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전후작가들이 제기한 여러 가지 문제가 미결상태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것은 공산침략의 참상과 계급주의의 극복, 남북분단의 불행, 새로운 가치의 확립들이라 하겠다”고 정리하고 있다. 레마르크의 수백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수십페이지에 지나지 않은 선우휘의 단편 <불꽃>은 로마의 장려한 콜로세움과 단아한 한옥과 같다. 장편의 특징은 거대한 구도다. 단편은 톡 쏘는 장맛의 언어다. 때문에 단편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것은 유능한 번역자를 얻은 힘이 컸다. 물론 패전한 일본이 일어나는 것을 격려하는 뜻도 있었다. 선우휘의 <불꽃>은 그의 예리한 안광만큼 강력한 문제를 던진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