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스파이였다①] “러시아 수상을 매수하라”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전 인터폴 부총재] 1914년 40세에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적십자사 야전병원 의사로 근무했다. 중간에 잠시 귀국 불륜상대 여성의 이혼을 처리해 스캔들로 비화되는 걸 막았다.

다시 전선으로 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이 41세. 현역복무로는 제한연령 초과, 호모라는 소문도 났다. 복귀 불가능했다.

1915년 9월, 존 아놀드 월린저가 접촉해왔다. “참전할 의향이 있다던데 첩보계에서 활동하면 어떠신가?” 넌지시 제의했다.

“파리에서 태어났으니 프랑스어 잘 하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독일어 유창하고. 그뿐인가?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도! 의사에 이름 난 작가. 어딜 가도 의심받지 않는 직업, 적격자일세.”

“좋습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게 있네. 임무 잘 수행했어도 칭찬 듣지 못하네. 곤란한 일 생겨도 도와줄 사람 없네. 우리 정부는 그런 사람 모른다 할 거네.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디즈레일리 기관원들

1873년 수상을 두번 역임한 벤저민 디즈레일리.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정보부장을 거쳐 국무대신 월싱엄이 16세기 후반 만들어 놓은 영국정보기관을 근대 정예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광대한 식민지를 다스리려면 많은 병력과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보기구가 잘 작동되면 소수의 군인과 공무원으로 족하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월린저, 46세, 식민지 인도경찰의 정보부서 간부. 벤저민 디즈레일리를 흠모했다. 유럽대륙에서의 인도 독립운동과 인도 무정부주의자 파괴활동에 대한 첩보업무 책임자였다. 심신을 바쳤다.

그는 의사이자 작가인 이 새 정보요원을 일류 요원으로 키우려 했다. 스위스에 배치했다. 전임자는 신경쇠약으로 쉬고 있어서 공석이었다.

당시 유명 문필가들의 유행 따라 제네바 최고급 호텔에 거처를 정했다.

하는 일은 부부 중 한쪽이 독일인인 영국인 가족의 反英, 親獨, 친인도 활동을 염탐하는 것이었다. 쉬운 일 아니었다. 세세하게 마크했다.

주1회 정기보고 꼬박꼬박 이행했다. 연락선 이용해 호수 건너편 프랑스로 암호문서 보냈다. 체포위험 감수해야 했다. 스트레스 쌓이고 건강 악화.

1916년 6월, 42세. 스파이 된 지 10개월. 도저히 못하겠다. “그만 두게 해 달라.” 사정사정해 풀려났다.

후임자 추천. 친구인 동갑내기 하버드대 출신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놉록(Edward Knoblock)이었다.

런던으로 가지 않고 프랑스 휴양지에서 거주하며 대학 시절의 호모파트너를 불러 같이 지냈다. 명목은 작가의 개인비서.

이미 결혼한 상태였으나 호모섹스로 인해 부부싸움 잦았다. 결국 이혼, 그리고 재혼.

러시아 수상을 매수하라

1917년 6월 43세. 뉴욕여행 중 SIS 뉴욕지부장 윌리엄 와이즈만에게 긴히 할 말 있다며 만나자 했다.

와이즈만이 부탁했다. “러시아가 연합국 의사 무시하려고 한다. 단독으로 독일과 휴전협정 맺으려고 움직이고 있다. 휴전이 되면 동부전선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돌리게 된다. 서부전선으로 온 병력은 영국 침공군으로 투입된다. 과도정부의 케렌스키 수상 만나 그렇게 못하게 공작해달라.”

암호이름 Somerville. 직업은 역시 잘 알려진 작가로 했다. 암호 책과 거액의 현찰 들고 출발했다.

샌프란시스코-요코하마-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횡단철도로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갔다. 소설의 소재 찾기 위해서 여행 중이라 했다.

뚱뚱한데다 키 작고, 다리 절고, 급하면 말 더듬고, 신사복은 고급인데 어쩐지 몸에 안 맞는 느낌이고, 얼굴은 온화한 영국신사.

어때? 스파이 같지? 전혀 아니었다. 간첩이라고 누가 신고해도 웃고 말 용모다. 그렇게 믿을 사람 단 한명도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름 날리는 영국 작가로만 알았다.

러시아에는 그의 펜클럽도 있었다. 회원 중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공작의 딸 사샤는 수상과 잘 아는 사이였다. 영국 작가를 흠모하며 앞장서서 면담 주선했다.

공작은 성공했으나

1917년 10월 17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수상는 영국 유명작가가 예방하는 형식으로 만났다. 통역은 사샤였다.

“가져온 원조자금은 가뭄에 단비요. 기쁘게 받겠소. 빨리 가서 영국 수상에게 내 말 전해주시오.”

그러면서 케렌스키 수상은 “정치적 지지보다 더 중요한 건 볼셰비키와 싸울 무기와 탄약을 공급”이라고 했다. 즉각 페트로그라드를 뒤로 하고 오슬로로 갔다. 구축함 타고 귀국해 수상에게 비밀정보부장 동석한 자리에서 그 말을 전했다. 로이드 조지 수상은 내키지 않는다 했다.

10월 25일 케렌스키 실각하고 평화와 빵 외친 같은 고향 출신 레닌이 정권 잡았다. 망명지 스위스에서 귀국할 열차 주선해준 독일과 약속한대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SIS의 러시아 사자는 허망했다. 대신 루마니아에 가서 활동해달라는 제의받았다. 거절하고 본업인 글쓰기로 돌아갔다. 신경 쓴 탓인가, 결핵 재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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