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동북삼성’의 모내기철 풍광을 좇아서
“조선인, 황무지를 옥토로···”
[아시아엔=강위원 사진작가] 중국 동북삼성은 겨울이 긴 혹한의 땅으로 무상기(無霜期)가 매우 짧다. 그래서 논농사에는 부적합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이주해 간 조선인들은 가혹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논농사를 정착시켜 중국의 곡창지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 논농사의 역사는 1845년 평북 초산의 80여 호가 압록강을 건너 혼강 유역인 관전현 하루하자(下露河子) 태평초(太平哨) 부근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을 기념해 환인만족자치현 괴마자진 와니전자촌(예전 마을 이름은 하전자)에는 “1875년에 환인현의 괴마자 하전자에서 조선인 농민들이 벼농사 시험에 성공해 벼재배 기술을 전 동북지방으로 보급시켰다”는 비석이 남아 있다.
1860년대 초에는 먼저 안동(지금의 단동)지역에 논농사가 보급되었고 1920년대는 요녕성과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의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벼 재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반도의 가난한 농민들은 물론 이미 중국에 건너와 있던 조선인 농민들도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으로 모여들어 황무지를 개간해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지었다.
조선인들이 논농사를?위해 택한 땅은 늪지나 갈대밭?등이었다.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만주족이나 한족들에게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그래서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간 조선인들은 어렵지 않게 경작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그곳에 물길을 끌어들여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를 만들었다.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가혹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혹한의 땅에서 논농사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 논농사로 벼 재배에 성공한다는 것은 요즘말로 첨단과학농법을 개발해 성공한 것과 맞먹을 만한 획기적 영농기술이었다.
필자는 다년간 중국의 동북지방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가혹한 자연환경을 극복해 개척해온 정황들을 볼 수 있었다.?그중?모내기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심기를 위해서는 볏모를 재배해야 하는데, 벼가 싹이 트고 성장할 시기에는 기온이 너무 낮아서 제대로 생육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냉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개발한 방법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싹을 틔우고 벼 모종으로 키우는 것이다. 지금은 비닐하우스지만 예전에는 콩기름을 바른 종이로 못자리를 덮었다고 하니 그들의 노고가 얼마나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모종판에 볍씨를 넣는 것은 한국과 같다. 그러나 모자리가 들판의 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 채전에 있는 것이다. 마당이나 채전에 모종판을 놓고 흙과 볍씨를 넣은 다음 모종판이 덮일 정도로 숯가루를 넣는다. 그 다음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수도와 호스를 연결하면 못자리가 완성된다. 그리고 시간에 맞추어 물을 준다.
필자는 마당에 있는 못자리가 신기해서 여러번 그 안에 들어가 보았다. 비닐하우스의 위력인지 내부 온도는 상당히 높았고 바깥과 기온차 때문에서 수분이 증발해 습도가 높아졌다. 또 숯은 방부제와 살충제 등 농약의 역할과 함께 비료의 효과도 가지고 있어 최근 무농약 유기 농법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모심기를 하는 계절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다. 모심기를 하고 나면 아무리 혹한의 동토라 하더라도 기온이 올라가기 때문에 냉해를 입을 염려는 없다. 그러나 바람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곳곳에 방풍림을 심어서 강풍에 대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첫번째 사진 설명 : 비석 이름 중 ‘수전’을 ‘수도’로 수정해야 합니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것으로 이해하지만 비명을 고쳐 쓴 거는 잘못된 겁니다. 기사 내용은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