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탈 실검 1위 ‘박노해’ 기사를 읽으며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여름이다. 무더위가 다가오면서 문득 박노해 시인의 모친 별세 2주기가 다가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다음의 기사로 그 소식을 전했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164822)
2016년 여름날, 박노해 시인의 모친 故 김옥순 여사는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유언은 이러했다 “나는 한평생 바치고, 바치고, 또 바치며 살았다. 큰아들과 막내딸은 하느님께 바치고 작은 아들네는 나라에 바치고 두 딸은 이웃들 곁에 바치고 나는 기도를 바치고 살아왔다.” 지금도 그 말씀을 떠올리면 굴곡진 현대사 속에 노동자 시인이자 사형수를 아들로 둔 홀로된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그런데 우연히 어제 오후 한 포털사이트 실시간 뉴스 검색어 1위에 박노해의 이름이 보여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관련기사를 찾아봤는데 그 기사들로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박노해라는 이름이 실검 상위에 올라왔다는 이유로 누군가 자극적 제목으로 짜깁기용 기사를 올렸다는 생각에 내 얼굴이 다 뜨거워지고 혼란스러웠다.
한 사람에 대해 기사를 쓴다는 것, 그것에 대한 무게감을 다시 숙고하게 되었다. 한두 번이라도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사람을 맞이해보고, 사실과 시대상황에 맞게 쓰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가짜뉴스와 자극적 가십 기사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일까?
나는 80년대 중반부터 박노해 시인을 알아왔지만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실은 그에 대한 기사를 쓰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그의 글과 저항, 삶과 내면의 세계가 넓고도 깊다고 여겨왔다.
“역사의 빚.” 일찍이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1980년대를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박노해는 역사이고 상징이며 신화이다. (…) 그는 시대의 아픔이었고 불꽃이었으며 함성이었다. 사회 모순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의 고통과 꿈과 투쟁을 기적처럼 한 몸에 구현했던 투사-문학사적으로나 사회사적으로 우리는 그런 존재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 그에 대한 기억이 어떤 것이건 간에 우리는 누구도 ‘박노해’를 지울 수 없다. 그의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은 이 시대 모든 한국인의 삭제할 수 없는 운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현대 한국인은 박노해라는 이름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 여러 부류의 이해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모두 내부적으로 제각각 몇 퍼센트씩은 그를 유배한 자이고 동시에 그의 지지자이며, 비판자이고 동조자이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집단적 운명을 이처럼 자기 개인의 운명에 붙들어 맨 존재가 일찍이 있었던가!”
박노해 시인은 <노동의 새벽>이라는 한국문학에 화인처럼 새겨진 불멸의 고전을 남긴 사람이다. 1984년, 한 청년 노동자이자 ‘얼굴 없는 시인’이 쓴 이 시집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대학생인 내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던가? 노동자라는 말조차 금기시되던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 현장노동자 박노해가 쓴 이 시집은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부 가까이 판매됐다고 한다. 시의 힘이 무엇인지, 노동자란 어떤 존재인지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한겨레신문 기자로 1990년과 1991년 봄, 이태에 걸쳐 울산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파업 현장을 취재할 때 노동자들은 박노해와 그의 시와 삶을 얘기하던 모습을 봤다. 노동자들의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박노해 시인은 군사정권에 의해 1급 수배자가 되었고 6년여 도피생활 끝에 1991년 안기부에 의해 긴급체포된다. 당시, 수갑 찬 몸으로 세상을 향해 절규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고 아프지 않았을 지식인이 있었을까?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는 박노해에 대한 온갖 억측 거짓 정보를 배포하며 악의적 선동을 일삼았다. 정말 불행한 일이고 오늘 우리는 이런 짓들을 적폐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그런 글들이 유포·재생산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박노해는 체포 후 25일간의 살인적 고문과 50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7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노해는 옥중에서 쓴 글을 모아 1997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발표한다. 사회주의 붕괴와 21세기의 여명을 묵도하며 발표한 이 책은 당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는 무너졌어도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지켜 가자”라는 그의 말이 불편했을 터다. 그에게 붙은 딱지는 ‘변절자’. 하지만 나는 그의 책 어디를 읽어봐도 ‘변절’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시대를 제대로 읽는 ‘변화’의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던 그의 말처럼 박노해의 변화는 출소 이후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는 결코 변질·변절한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 변화하며 시대의 아픔을 다시 껴안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열며 그는 ‘나눔문화’(http://www.nanum.com)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했는데 생명·평화·나눔을 지향한다. 아름다운 저항과 대안 삶의 문화를 모색·실천하는 곳이다. 나눔문화는 20, 30대 청년들을 주축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들이 발표하는 성명서·시위현장 피켓·박노해 시인의 시와 메시지 등은 기자인 내가 종종 참고할 정도로 균형감과 품격이 있다. 지난 촛불혁명의 현장에서 많은 시민들이 들고 있던 빨간 피켓 또한 이 단체의 작품이다.
박노해 시인은 지난 20여년간 분쟁지역을 찾아 흑백사진을 찍어 사진전을 여러 차례 열었다. 지난 201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사진전 <다른 길>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나의 유랑길은. 한 시대의 끝간 데까지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체제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앞선 과거’로 돌아 나오고자 하는 기나긴 유랑길이었다. 오래된 만년필과 낡은 흑백 필름 카메라 하나를 들고 내가 가 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 (…) 나는 실패 투성이 인간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인생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박노해 사진에세이 <다른 길> 가운데).
그가 다녀온 나라는 이라크, 팔레스타인, 아체, 버마, 파키스탄, 수단, 페루 등 다양하다. 그런 나라의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을 알아달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역할을 소리 없이 떠맡아온 박노해 시인의 활동을 나는 마음으로나마 늘 지지해왔다. 그것이 70년 분단체제를 뛰어넘어 한반도 평화의 시대로 가는 한국인으로서, 글로벌 시민으로서 내가 부담해야 할 마땅한 몫이란 생각에서다.
어제 박노해 관련 기사에서 논란이 된, 오래 전 제작된 다큐멘터리와 동일한 제목의 시 ‘세발 까마귀’에서 박노해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말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변화한 현실 속에서 내가 먼저 그것을 살아냄으로 좋은 생각이 좋은 삶을 낳을 수 있음을 증거하겠습니다.”
말이 아닌 먼저 살아냄, 내가 먼저 살아가는 좋은 삶,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박노해라는 이름을 마주하며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