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헤이그밀사 이상설은 빼어난 근대수학자였다
보재 이상설의 감춰진 이야기 ‘읽기 쉬운 이상설 평전’
[아시아엔=김혜린 인턴기자]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1907년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명인 보재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유언이다.
보재 이상설 선생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그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초 독립운동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학문 특히 근대수학과 과학 등에 빼어난 업적을 나타냈다. 수학·과학 등 신학문을 놀라운 속도로 흡수하고 수학교과서를 지어 보급하기도 했다.
이상설 선생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영어·일어·프랑스·러시아어를 배웠고 정치·법률·경제·사회·과학·철학·종교 등 e다방면에서 높은 경지에 이를 정도로 뛰어났다. 학우들과 신학문을 공부할 때도 이상설의 이해력은 기이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뛰어났던 분야는 수학이었다. 그는 당시 수학의 제1인자로 칭송되며 학계에서 가장 먼저 근대 서양 수학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집필한 <산술신서>는 이상설 선생으로 하여금 ‘한국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산술신서>의 존재는 한국의 근대학문 도입이 일제식민 교육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증거다. <산술신서>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전수해 준 ‘가감승제’(加減乘除), 소학교, 중학교 수학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다. 이는 일본이 신문물을 한국에 들여왔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이전 이미 주체적으로 개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 24일자에서 “씨(이상설)는 원래 대한에서 학문으로 제일류이다. 일찍이 학문적 소양이 투철하게 뛰어나서 동서학문을 다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법률·산술 등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고 했다. 그를 신구학문을 겸비한 학자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 근대교육에 이렇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설 선생에 대한 행적이 헤이그 특사 이외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의 유언에서처럼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기록과 문헌을 지우길 바랐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기초 수학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대 교육의 근간이 되는 인물에 대해 더 관심을 쏟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상설 선생은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한국 근대수학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이사장 이상래)는 한국 근대사에 남긴 큰 족적에 불구하고 덜 알려진 선생의 행장(行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읽기 쉬운 이상설 평전>(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을 펴냈다.
이상래 이사장은 “현재 충북 진천 이상설 선생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 중”이라며 “이곳에서 매년 수학경시대회 등을 개최해 선생의 뜻을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병석·정제우·이연우 등 공동저자는 2017년 이상설 선생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읽기 쉬운 이상설 평전>을 집필했다. 이들 저자 가운데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밝혀낸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