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5일] 여성 사회주의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출생

1971년 북아일랜드 독립시위

1971년 3월5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시민들이 유조차와 버스에 불을 지르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과격 시위가 계속되자 영국군이 출동, 대치 끝에 시위대를 무력 진압한다. 3년 전인 1969년부터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영국에 대한 테러활동을 시작하면서 영국과 북아일랜드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심화됐다.

벨파스트 시위 이듬해인 1972년 1월30일에는 영국군의 발포로 14명이 사망하는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IRA의 테러가 더 극심해진다.

사고 당시 영국 보수당 내각의 교육부 장관을 지내던 대처는 나중에 영국 수상이 된 뒤인 1984년 10월12일(영국 현지 시각) 그녀 자신을 노린 IRA의 호텔 테러를 당한다. 보수당 연례 총회 마지막 날인 이튿날 대처는 창백하고 초췌했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옷매무새로 총회 연설을 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테러리즘을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라(All attempts to destroy democracy by terrorism will fail. It must be business as usual”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1970년 핵확산 금지조약 발효

1970년 3월5일 “핵을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새로 핵무기를 갖는 것과 보유국이 비 보유국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약”인 ‘핵확산 금지조약(核擴散禁止條約,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이 발효됐다.

1966년 후반부터 미·소의 타협이 진전되어 1967년 초에는 미·소 간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소 초안의 심의를 맡았던 제네바 군축위원회에서는 비핵보유국이 특히 비판적이었다. 위원회는 ▲핵의 평화적 이용도 금지된다는 것 ▲핵보유국의 핵군축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핵 활동에 대한 사찰이 자주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 ▲비핵보유국의 안전보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 ▲기한 25년이 너무 길다는 것 등을 문제로 지적했다.

미·소 양국은 이런 반론을 감안, 비핵보유국과 교섭을 벌인 결과 1969년 6월12일 UN총회는 95:4, 기권 13으로 이 조약의 지지결의를 채택했다. 조약 발효를 위해선 핵무기 보유국인 서명국 전부와 나머지 40개국의 비준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모든 절차 마무리 단계인 미·소의 비준서 기탁이 끝난 1970년 3월5일이 조약 발효일이 된 것이다.

2010년 6월 현재 가맹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핵보유국을 비롯한 189개국이다. 핵보유국인 프랑스와 중국은 미·소 위주의 성격에 반발해 최초에는 가입하지 않았다가 1992년에 가입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 쿠바 등이 미가입국으로 남아 있다. 북한은 1985년 12월에 가입했으나 특별 핵사찰 요구에 반발해 1993년 탈퇴를 선언했다가 보류했고, 다시 불거진 북한핵개발 문제로 2003년 1월10일 또다시 탈퇴를 선언했다. 남한은 1975년 4월23일 86번째 정식 비준국이 됐다.

당초 조약은 25년 기한이었다. 그러나 1995년 5월11일 뉴욕 평가회의에서 서명국 합의로 조약 기한을 조건 없이 무기한 연장키로 결정했다.

1953년, 지구촌을 2개 진영으로 쪼갠 스탈린 사망

1953년 3월5일 구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이 숨을 거뒀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스탈린은 24년 1월21일 레닌의 사망과 함께 소련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후 53년 3월5일 숨을 거둘 때까지 약 30년간 최고 권력자로 자신의 이름처럼 ‘철권’을 휘둘렀다.나흘 전인 3월1일 침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반신마비 상태로 4일을 앓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뇌출혈 혹은 뇌경색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의 부검결과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대숙청’의 행동대장이던 심복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암살됐다는 설도 있다. 영구혁명론을 주장했던 트로츠키 대신 그를 발탁했던 레닌은 유서에서 그를 중용했던 과오를 인정하고 “그를 제거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만들라”고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니치 주가슈빌리. ‘스탈린’은 원래 ‘강철 사나이’란 뜻으로 처음엔 그의 필명이었지만 정치입문 후 이름처럼 쓰이게 된다. 1938년 말까지 그의 손으로 숙청된 1200만명 중 처형된 사람은 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숙청은 스탈린이 1953년 죽을 때까지 계속돼 희생자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스탈린은 1937년 12월 사회 및 당 지도급 인사 3167명을 처형하는 문서에 서명한 후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판단을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는 얘기인데, 이런 쉬운 정치는 누가 못하나. 살육에 가까운 스탈린의 만행(정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비이성적이라서)에 대해 러시아는 2008년 학생 교과서에서 그를 “조국 근대화를 위해 합리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인물”로 묘사했다.

1871년 독일 혁명가 룩셈부르크 출생

1871년 3월5일 20세기초 독일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Luxemburg, Rosa)가 탄생했다. 1898년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적 단체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반대해 혁명노선을 지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바르샤바로 가서 투쟁에 가담했다가 투옥됐다.

석방된 후 1907년부터 약 7년간 베를린의 사회민주당학회에서 일하면서 <자본의 축적(Die Akkumulation des Kapitals)>을 집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사회민주당 내의 혁명당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해 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수립하려다가 투옥됐다. 1918년 독일혁명으로 출옥한 뒤 스파르타쿠스단을 독일공산당으로 개편하는 등 여러 활동을 벌였으나 스파르타쿠스단의 폭동 때 살해당했다.

“정부의 지지자들이나 한 정당의 구성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 항상 의견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자유가 바로 진정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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