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조절장애’ 시대 살고 있는 현대인,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서울대 보건학박사회 고문,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유대교 랍비 벤 조마는 “화(火)를 조절할 수 있는 자는 힘센 자보다 낫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도시의 정복자보다 낫다”고 했다. ‘분노 조절장애’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주 적확한 말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폭력범죄 가운데 우발적 범죄나 현실 불만 관련 범죄가 41.3%를 차지한다. 최근 서울에서 ‘분노의 방’(Rage Room)이 20-30대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고 한다. 미국, 일본 등에서 운영되는 ‘스트레스 해소 방’을 모델로 서울 홍익대 근처에 지난해 4월 개장했다. 다섯 개로 나뉜 화(火)의 단계 중 하나를 선택하면 15분간 깨고 부술 수 있는 물품이 제공된다.
단계가 높을수록 가격(2만-18만원)이 높아지고, 부술 수 있는 TV, 라디오, 프린터 등 전자제품과 그릇의 수도 늘어난다. ‘분노의 방’에 들어가려면 서약서를 작성한 후 안전모를 쓰고 파편을 막아주는 작업복과 장화를 신어야 한다.
요즘 신종 우울증 ‘비트코인 블루’가 2030세대를 흔들고 있다. 사소한 것에 분노가 폭발했다가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작년부터 가상화폐에 투자를 시작해 한때 원금의 10배를 벌었지만, 최근 가격폭락으로 힘들어했던 21세 청년이 자살을 했다. 취업난 등으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이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하고 비트코인에 투자하여 모든 것을 잃으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분노는 말과 행동이 돌발적으로 격렬하게 표현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장시간 노출되거나, 화가 가슴 속에 과도하게 쌓여 있으면 이것이 잠재돼 있다가 감정을 자극하는 상황이 생기면 폭발하게 된다.
이전에는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여 ‘화병(火病)’이 많았으나 요즘은 지나친 분노 폭발로 인해 ‘분노조절장애’가 많아지고 있다.
화병이란 우울증의 일종으로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질환이다. 화병은 우울감, 식욕저하, 불면증 등의 증상과 호흡곤란이나 심계항진(心悸亢進), 몸 전체의 통증 또는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 등의 신체 증상이 동반되어 나타난다. 화병은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적인 배경이 영향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병명(病名) 영문표기도 ‘hwa-byung’이다.
아래 12개 문항 중 1-3개가 해당되면 분노 조절이 가능한 단계이지만, 4-8개는 감정 조절능력이 다소 부족하고, 9-12개가 해당하면 전문가와의 심리상담이 필요하다.
(1)성격이 급해 쉽게 흥분하여 화를 낸다. (2)남의 잘못은 그냥 넘기지 못한다. (3)일이 안 풀리면 해결하기보다는 쉽게 폭발한다. (4)화를 조절하지 못해 중요한 일을 망친 일이 있다. (5)화가 나면 주변의 물건을 던진다. (6)무시 받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7)잘한 일은 인정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화가 난다. (8)내 잘못도 다른 사람 탓을 하게 된다. (9)분이 쉽게 풀리지 않아 운 적이 있다. (10)화가 나면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한다. (11)분노감이 생기면 조절되지 않는다. (12)게임할 때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치민다.
충동(분노)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s, anger disorder)란 ‘간헐적 폭발장애’와 ‘외상 후 격분장애’ 등 화를 참지 못하고 느닷없이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증상을 말한다. ‘간헐적 폭발장애’는 간헐적으로 공격적 충동이 억제되지 않아 심각한 폭력이나 파괴적인 행동이 발생하고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간헐적 폭발장애로 진단 받은 환자는 2012년 1,479명에서 2016년 1,706명으로 늘었으며, 전체 환자의 30.4%는 20대 남성이었다.
‘외상 후 격분장애(PTED, 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란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 이후에 부당함, 모멸감, 좌절감, 무력감 등이 지속적으로 빈번히 나타나는 부적응 반응의 한 형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에 근거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장애를 말한다.
분노와 우울은 언뜻 다른 범주처럼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얽혀 있다. 즉, 감정을 표출해 주변인의 일상을 파괴하는 적대적 반항장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반사회적 성격 등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 공격성이 자신에게 향하는 우울, 불안, 강박 등의 증상도 있다. 공격성이 타인을 향하는 가해자 유형은 문제를 부인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피해자 유형은 문제를 과장해 괴로워하는 편이며, 자신을 향한 극단적 분노로 표현되는 것이 자살이다.
현대인들은 가정, 학교, 사회 등에서 끊임없이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분노를 느끼는데 이런 감정을 배출할 곳도 없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쌓여 있다가 폭발한다. 우리 사회가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지 않아 병을 부추기고 있다. 물론 개인 성향도 있지만 사회적 요인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핵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고민을 나눌 대상이나 기회 등도 적어지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 가타다 다마미(片田珠未)는 <왜 화를 멈출 수 없을까> 저서에서 “분노를 쌓아두었다가 폭발시키기보다 표현하는 방법인 ‘화(火)내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화내는 기술이란 사실은 폭발을 방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화내는 기술’은 (1)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분노의 원인이 된 사항에 관해 5가지 요소(행동, 해석, 감정, 영향, 희망)를 정리해서 말한다 (2)본인의 의도를 전했다면, 이번에는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본다 (3)상호 의사를 전달한 후 절충점을 찾도록 하지만, 만약 상대가 완고하다면 현실을 명확히 판단하고 포기한다.
‘화내는 기술’을 활용하는데 선결사항으로 (1)분노를 자각하고, 화내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강박관념을 버린다 (2)평소에 분노를 조금씩 드러내며, 하루에 한번 화를 낸다 (3)대개 분노의 근저에는 무력감이 숨어있으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절감하기 때문에 왜 분노를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샤 리네한(Marsha Linenhan) 박사가 개발한 변증법적 행동치료(Dialectical Behavioral Therapy, DBT)는 성격장애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입증된 치료법이다. ‘주의 돌리기’와 ‘이완하기’ 등 두 가지 기법은 자신이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주의 돌리기’는 분노의 감정이 인식되는 순간, 자신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즉 손으로 얼음 조각을 꽉 쥐거나, 손목에 채워 놓았던 밴드를 당겼다가 놓는 등의 순간적인 행동으로 주의를 돌린다. 또는 친구나 가족에게 전화를 하는 등 타인에게 주의를 돌린다. 언제든지 실행이 가능한 목록을 만들고 이 목록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이 좋다.
‘이완하기’란 분노의 순간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화를 이완시키는 방법이다. 분노의 감정은 체내 교감신경을 항진시켜, 온 몸을 긴장시키고 머리에 피가 쏠리고, 흥분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완하기는 부교감신경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방법이며, 오감(후각, 시각, 촉각, 미각, 청각)을 이용한다. 나에게 익숙하고, 나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좋으며, 분노의 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목록을 작성해 놓는다.
분노조절장애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화를 통제하지 못하고 표출한 뒤에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기 쉬우며, 이로 인해 우울증, 불면증 등을 수반할 수 있으므로 치료를 받은 것이 좋다. 치료는 질환별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약물치료와 정신치료(인지행동치료, 분석적 정신치료, 지지치료, 상담 등)를 병행하는 방법이 흔히 사용된다. 건강한 삶을 위하여 스스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상황을 유연하게 해석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