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일] 타이완 항일독립투사 뤄푸싱 형장의 이슬로
2011년 중국 공산당 “민생·행복” 목청
2011년 3월3일 중국 연례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전인대·정협)가 막을 올렸다. 이날 개막한 국가정책자문기구 성격의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5일부터 시작되는 의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맞아 중국 공산당은 민생과 행복을 새로운 정치 좌표로 제시했다.
당시 식품가격과 부동산 가격 급등, 부정부패, 강제철거에 대한 분노가 확산되고 중동에서 ‘재스민 시위’ 시도가 나타나자 중국 지도부는 민심 이반과 사회 불안을 막기 위해 사회보장, 주택, 취업 문제 해결, 의료, 교육 개선 등 민생 개선을 잇따라 약속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네티즌과의 대화에서 “인민 생활이 편하고 안전하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한 첫 조처로 개인소득세 면세점을 현재 월 2000위안(34만 원)에서 3000위안(51만 원) 정도로 높여 취업 인구의 20% 이상에 대해 소득세를 면제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2012년 시진핑 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5세대 지도부로의 권력이양을 앞두고 정치 ‘새 판 짜기’에 몰두해야 하는 중국 정부로서는 사회 안정이 가장 절박했다. 물가와 주택, 사회복지 등이 당연히 화두가 됐다.
아울러 올해 양회의 핵심 의제는 12.5계획을 심의· 확정하는 작업이다. 12.5계획은 중국이 1979년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개혁개방 이후 30년 만에 경제발전방식의 대전환을 시도하는 로드맵이다. 수출 중심 성장모델을 내수 중심으로 전환하고, 이를 위해 분배구조를 개선해 성장의 부가 전계층에 고루 돌아가게 하는 ‘포용성 성장’을 목표로 삼았다.
2007년 성폭력 추방 뜻 담은 ‘브이-데이’ 한국서 첫 행사
2007년 3월3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브이-데이’(V-day)행사가 열렸다. ‘브이-데이’는 여성 폭력 추방의 뜻을 담아 세계 각 나라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여는 연극 행사다. 행사 참가자들은 매년 2월14일 밸런타인데이와 3월8일 세계여성의 날 사이에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를 공연하고 수익금 전액을 다양한 여성 폭력 추방 운동에 쓴다. 여성의 성기를 거침없는 독백으로 등장시키는 연극을 통해 유교적 남성성을 딛고 당당한 현대여성상을 펼치는 국제 행사로 유명하다.
각국에 퍼져 있는 행사기획단은 1998년부터 지금까지 4000만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마련해 여성폭력 방지교육, 피해자 쉼터 마련, 5000여개 공동체의 비폭력 프로그램을 지원해왔다.
행사를 제안한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서 역사관 영어 안내 도우미를 하던 한국인과 외국인 여성들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지난 2달 동안 일반인 오디션과 무대 연습을 차례로 진행했다.
2005년 ‘브이-데이’ 기획회의에서 세계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2011년 행사 주제는 전쟁과 무력 갈등 상황에서 여성에게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성폭력의 문제였다. 3월3일 시작된 공연은 이틀 간 서울 홍익대 앞 라이브 공연장 ‘빵’에서 열렸고, 주최측은 여성 폭력 추방 운동에 써 달라며 모든 공연 수익금을 ‘한국 여성의 전화 연합’에 기부했다.
2007년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사우디 방문
2007년 3월3일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시아파의 나라 이란이 앙숙인 수니파의 나라를 방문, 두 나라가 타협의 길로 접어들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2005년 8월 취임 뒤 사우디 국왕과 첫 정상회담을 여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결정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지역 수니파 국가들이 미국에 기대어 이란을 견제하는 노력을 강화해왔던 당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사우디가 매사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외교 전통을 깨고, 주변국들을 규합하면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내분 조정자로 나서고 있다.
당시에도 무력충돌설이 돌았던 미국과 이란 관계에 사우디가 중재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론됐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강경파들을 따돌리고 북핵 6자회담을 타결시킨 데 이어 이란·시리아에도 ‘신실용주의’를 적용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백악관은 회담 참여가 정책 변화는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결국 미 행정부가 ‘악의 축’인 이란·시리아와도 직접대화를 통해 성과를 내려 할 것이라고 이 신문은 내다봤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으로 최근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미-이란 갈등과 관련, 외교 전문가들은 “여전히 사우디 인사 대부분이 이스라엘-이란 분쟁에 연루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사우디 정부는 이미 유엔 안보리 결의 없이 어떠한 형태의 지원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종교적으로 앙숙인 시아파 국가 이란이 수니파 국가인 자신들에게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는 해도, 명시적으로 미국이나 이스라엘 편을 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장 자국 국민의 반미·반정부 정서 폭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은 바레인의 집권 세력과 저항세력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통 받는 바레인 국민들을 보면 안타깝지만 종교문제가 개입돼 있는 한 국제사회는 함부로 의견도 내기 어렵다. 종교가 인류에 선사한 또 하나의 비극인 셈이다.
1991년 로드니 킹 폭행사건
1991년 3월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경찰관이 과속으로 차를 몰던 흑인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구타를 했다. 이 장면은 근처 아파트에 살던 한 주민이 개인용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다음날 TV방송으로 미국 전역에 공개됐다. 사건에 연루된 경찰관 4명은 모두 백인으로, 이들은 “로드니 킹이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고 경찰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애썼으며 법은 공정하게 집행됐다”고 주장했다. 증인으로 나선 동료 경찰관은 “이들이 킹 때문에 굉장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며 정당방위 쪽에 무게를 실어줬다. 그리고 모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1992년 4월29일 폭행 경찰들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렸다.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른 바 ‘로드니 킹 사건’은 이듬해인 1992년 봄 로스앤젤레스 사상 최대규모 폭동의 계기가 됐다.
로스앤젤레스는 ‘인종갈등’이라는 활화산 폭발로 이어진 도화선이 또 있다. 1991년 가을슈퍼마켓을 운영하던 한국인 여성이 15세 흑인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 말싸움을 벌이다가 총격을 하는 바람에 이 소녀가 숨졌다. 검사는 흑인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판사가 400시간 사회봉사 명령과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면서 흑인사회의 불만은 점점 임계점에 이르렀다.
그렇게 일어난 폭동은 사흘간 계속됐다. 흑인들은 백인, 아시아인들의 가게를 무차별로 약탈하고 방화했다. 이 과정에서 55명이 숨지고 2000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식료품 가게 등에서 흑인들과 직접 부딪치는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탓에 한국인 상점의 피해가 컸다. 한국인들은 부자 백인들처럼 경찰의 보호도 받지 못했다.
이 영향으로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됐고 전체 피해액 7억1000만 달러 중 한국인의 피해가 3억5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파장이 커지자 로드니 킹 사건의 관련 경찰 4명은 1993년 연방 재판정에 다시 서게 됐다. 2명은 징역 30개월에 처해졌고 나머지 2명은 무죄가 선고됐다. 킹은 로스앤젤레스 당국으로부터 380만 달러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사업실패와 변론비용 등으로 대부분 잃었다고 한다.
1914년 타이완 항일운동가 뤄푸싱 처형
1914년 3월3일 타이완의 항일 독립운동가 뤄푸싱(羅福星, Lo Fu-hsing, 1886.2.24~1914.3.3)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설치한 임시 법정에서 항일거사 주모자라는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겨우 29세였지만, 침착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기록이다.
뤄푸싱은 1886년 2월 24일 인도네시아 바타비아(Batavia, 오늘날 자카르타) 교포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기에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췄다. 특히 타이완에서 살던 몇 년 동안 타이완 동포가 일본 식민 통치 아래 받는 고통은 그의 자아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가 항일 독립투사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을 몰아내고 청(淸)나라를 뒤엎어야만 타이완 광복의 바람이 있다고 봤다. 1907년 뤄푸싱은 퉁멍후이(同盟會)에 가입, 혁명의 뜻을 세웠다. 그 뒤 자바 섬 일대 화차오 업무를 시찰하는 일을 하여 싱가포르 화차오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버마와 방콕 등을 돌며 일본 타도와 타이완 광복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했다. 1911년 ‘황화강(黃花岡) 의거’때는 량광(兩廣) 총독서를 공격했다가 부상을 입고 어렵게 탈출하기도 했다. 우창 기의(武昌起義) 뒤 뤄푸싱은 남양 의군 2000명을 모아 귀국, 혁명을 도와 청(淸)을 뒤엎는 바람을 실현했다. 혁명 성공 뒤 뤄푸싱은 타이페이에 ‘퉁멍후이 지부’ 설립하고 먀오리에 총괄 기관을 뒀다. 고려 인삼을 판매하는 상인으로 신분을 위장, 각 지역 항일 지사들과 연락을 취해 신속하게 타이완 전역에 항일 조직을 두루 펼쳤다.
1913년 3월, 뤄푸신은 드디어 큰 의거를 꾀했다. 하지만 거사가 탄로나는 바람에 단수이(淡水)로 몰래 달아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체포됐다. 일본인들은 이를 ‘먀오리 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임시 법정을 설치, 일방적인 재판을 통해 200여 명을 잡아 들였다. 뤄푸신은 그해 3월3일 차디찬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타이완 국민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그의 젊은 항일독립정신이 오롯이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