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완의 사색진보] 리버럴과 라이트, ‘우파들의 대립’
‘덜 우파’와 ‘더 우파’의 대립
이념 스펙트럼상 리버럴과 라이트는 중도우파와 우파의 위치에 서있다. 라이트는 우파적 속성이 더 많은 ‘더우파’이며 리버럴은 상대적으로 적은 ‘덜우파’라 할 수 있다. 좌파가 허용되지 않았던 한국의 제도권 정치를 둘로 가르는 기준점이 이 곳이었으며 이들이 여당과 야당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한국전쟁 이후 절멸됐던 자생적 좌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2006년 선거를 통해 원내에 진입함으로써 현실정치권에서 한 축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좌우 균형을 이루지 못해 한국정치는 한쪽 날개로 나는 새처럼 불구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같은 우파가 두 개로 나뉘다 보니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당을 옮겨다니는 일도 대수롭지 않았다. 세계관의 차이도 정책적 구별도 분명하지 않아서 이 틈을 영호남 지역주의가 가르고 들어왔다. 호남사람 중에도 보수가 있고 영남사람 중에도 진보가 있었지만 정치판에서 이런 차이는 무시됐다. 정치인들 간에 이념 차이가 크지 않아서 이권이나 연고에 따라 합종연횡했고 날치기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정치환경은 좌파가 없는 나라 미국의 영향 때문에 더욱 강고해졌다. 미국정치는 진보 보수로 나뉠 수는 있어도 좌파 우파로 나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있다. 민주당 출신의 오바마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의료개혁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보수적인 시민운동단체인 티파티 운동가들로부터 “당신 소셜리스트지?”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대해 “오, 노우. 나는 소셜리스트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에 걸쳐 생활하던 어떤 미국동포에게서 이런 의문이 생겨났다. 자유는 리버럴의 것인가 라이트의 것인가.
미국동포가 서울 와서 놀란 까닭은
몇해 전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우연히 본 것이어서 출처는 잊었지만 지금까지 뚜렷이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미국동포가 서울에 와서 거리를 지나다가 반공 구호가 실린 플래카드를 보고 놀라서 말했다. 그가 놀란 것은 반공 구호보다 이 플래카드의 아래에 쓰여 있는 자유총연맹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미국에서 자유는 진보의 것인데 한국에서는 왜 극우반공단체가 가지고 있지?”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국동포가 겪은 놀라움은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이어서 무시해도 될 일일까. 그의 눈에 신기한 것으로 발견돼 드러났을 뿐 우리가 모두 겪고 있는 일이다. 다만 인식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사회 구성원 중에 미국동포라는 외부자에게 이런 이상한 현상을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현상이 정치의 마당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이 두가지 입장은 모두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어서 더욱 구별이 어렵다. 여기서는 리버럴과 라이트라고 부른다.
유시민 뉴라이트 무엇이 다른가
“왜 한국사회에서 진보가 사랑받지 못하는가. 그것은 자유주의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진보주의가 자유주의를 계승했었다. 그래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 진보가 확장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적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 -유시민 ‘선거연합, 가능한가?’ 2011년 3월2일 대토론회 프레스센터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주의만이 진정한 진보의 길을 걸었다. 보수주의도 혁신주의도 자유주의와 같은 길을 걷는 동안에는 진보의 편에 설 수 있었지만 자유주의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진보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 순간 예외 없이 인류를 고통에 빠뜨리는 멍에로 작용했다.” -자유주의진보연합 창립선언문 ‘21세기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 자유를 향한 전진이 진정한 개혁이다’ 중에서 2009년 7월
2011년 3월 열린 토론회에서 노회찬이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따로 가는 게 좋다고 주장하자 이에 반론을 펴면서 유시민이 위와 같이 말했다. 문제는 유시민의 발언과 뉴라이트 단체 ‘자유주의진보연합’의 창립선언문의 취지가 너무 흡사해서 구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미국동포가 서울 거리를 지나다가 겪은 혼란의 내용과 같은 것이다. 필자가 시도하는 ‘사색진보’는 결코 관념적 사변적 활동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신적 혼란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리버럴도 라이트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자유주의가 진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유의 영역이 워낙 넓어서일까. 이들이 각기 어떤 자유를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고 최근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논란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두 가지의 자유주의를 보면 된다. 정치적 사회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흔히 전자는 진보 후자는 보수로 분류된다. 이 두 가지가 리버럴과 라이트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7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자유의 깃발을 들고 민주화운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정치사회적 자유주의가 이해될 것이다. 반면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곧 신자유주의로 연결된다. 이 두 가지 자유주의를 더 잘 드러나게 해주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리버럴의 투쟁사례들이다. 그런 사례를 만들어준 사람이 있다. 스스로를 반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이다. 그는 자유주의와 자유주의가 얼마나 치열하게 맞서는지 보여준다.
자유주의와 싸우는 자유주의자 장하준
장하준은 2010년 펴낸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통해서 신자유주의를 통쾌하게 쳐부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렇다고 그가 좌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책으로 현대자동차의 포니정 상을 수상했다. 이 상의 수상은 장 교수가 좌파가 아님을 ‘신원보증’해 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리버럴이며 그가 공격한 것은 라이트의 영역에서 벌어진 신자유주의 현상들이었다. 자유주의자였으므로 또 다른 자유주의의 어두운 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리버럴과 라이트의 차이를 현실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례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다. 두 정당의 이념 차이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보수적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라고 구분할 수 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의 경우에도 이 틀은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좌파가 금지된 남한에서는 우파와 우파까리 싸우는 구도였다. 그것은 자세히 보면 “덜우파”와 “더우파”로 나뉘는데 바로 리버럴과 라이트이다. 한국인에게는 공기처럼 상시로 호흡하고 살아온 환경이다. 전통적 정치구도에서 여당과 야당도 이 구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