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8일] 중국반대 무릅쓰고 달라이 라마 만난 오바마
2010년 오바마, 백악관서 달라이라마 면담
2010년 2월18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의 면담을 강행했다. 달라이 라마는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동 직후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도 면담을 가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맵룸(Map Room)에서 달라이 라마와 1시간 넘게 비공개 면담을 가졌다.
백악관은 중국 측의 반발을 의식, 오바마 대통령과 달라이 라마의 회동장소를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가 아닌 맵룸으로 택해 비공개로 진행했다. 달라이 라마는 과거 수 십 년 간 여러차례에 걸쳐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지만 대부분 비공개 형식으로 오벌 오피스가 아닌 장소에서 면담이 이뤄졌다.
언론공개용 사진도 백악관 자체 촬영분 사진 1장만을 언론에 배포했다. 회동에 대한 설명도 구두 브리핑이 아닌 기브스 대변인 명의의 성명서로 대체했다.
이번 회동을 앞두고 중국 외교부는 “미국은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분이며 티베트의 독립에 반대한다는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면서 “오바마 대통령의 달라이 라마 면담 계획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07년 시리아-이란 반미(反美) 공조키로
17~18일 이틀 일정으로 이란을 방문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와 만나 “이라크와 레바논에서 진행 중인 미국의 ‘음모’에 맞서기 위해 협력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아랍의 두 반미 국가 이란과 시리아가 ‘반미’ 전선의 협력자임을 다시 확인한 것.
알아사드 대통령은 17~18일 이틀 연속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연 뒤, 이란 핵개발에 대한 지지를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라크·팔레스타인·레바논과 아프간 등 지역 정세는 ‘적들’(미국과 이스라엘)의 계획에 맞서 이란과 시리아 두 나라에 협력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알아사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은 이라크 문제를 둘러싸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협력을 강화하려는 이란에 대해 시리아가 ‘배신감’을 느끼는 가운데 이뤄진 것으로 평가했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는 이라크 문제 해결을 두고 이해관계가 달랐다.
알아사드 대통령의 방문은 또 이란의 우라늄 농축 계획에 대한 유엔의 60일 내 중단 권고 만기를 며칠 앞두고 이뤄진 것이어서 미국 등 서방국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알아사드 대통령의 이번 이란 방문은 2000년 권좌에 오른 뒤 다섯 번째이며, 2005년 8월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취임 뒤 두 번째다.
2003년 한국 대구 지하철 화재로 196명 사망
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5분쯤 대구시 중구 남일동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구내, 진천동에서 안심동으로 운행하던 1079호 전동차안에서 연기와 화염이 치솟았다. 김대한씨가 불을 질러, 열흘 뒤인 같은 달 28일 현재 196명이 사망하고 147명이 부상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2개 편성 12량(6량×2편성)의 전동차가 모두 불탔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 규모였다. 사고 뒤 열차는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도 불에 타서 영업을 한동안 중단했다.
참사의 방화자인 김대한씨는 평소 반신불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병원 의사 탓으로 돌리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희생자 중 92.3%에 달하는 대부분이 화재 후 건너편 정차장에 들어온 1080호 전동차의 승객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참사의 실제 원인이 방화사고 후 대구지하철공사 직원들의 신고와 연락 체계상의 문제 탓인 것으로 확인돼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찰조사결과 기관사가 피신 당시 무심결에 마스컨키(마스터 컨트롤러 키)를 뽑아들고 나가 승객들을 완전한 어둠 속에 갇히게 했고, 결국 1080호 승객들의 탈출이 불가능해져 대형 참사가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대구 지하철 참사 수사본부는 방화·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11명을 사법처리했다. 참사로 인한 재산 피해액은 441억 원에 이르렀다.
1981년 이른 바 ‘레이거노믹스’
1981년 2월18일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는 경제정책을 발표한다. 레이거노믹스는 ‘레이건’과 ‘이코노믹스’의 합성어로, 라디오 방송자 폴 하비가 레이건(Reagan)과 이코노믹스(economics, 경제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합쳐서 만들어 낸 말이다.
정부 간섭을 줄이는 대신 시장과 기업의 자율을 확대하고, 생산을 촉진시켜 수요를 진작하는 ‘공급경제학’의 경제활성화 정책이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레이건 임기동안 실행됐다.
레이건은 한달 전 미국 역사상 최고령인 70세의 나이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가 취임 때 내건 구호는 ‘강하고 풍족한 미국’. 당시 미국은 두 자릿수의 물가상승률과 높은 실업률, 마이너스 경제성장 등으로 허덕이던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직후 복지예산 삭감, 감세, 정부 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구현됐다. 레이거노믹스의 근거는 부자들이 고용과 소비를 늘리면 그 덕분에 서민도 잘살게 된다는 소위 ‘트리클다운 효과’. 그러나 이 효과는 상당 부분 실패로 결론이 났다. 레이건 재임 시절 실업률과 물가압력을 낮추고 경제성장을 안정화시키기는 했지만 당시의 정책이 현재까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부채의 급증이다. 레이건 임기 동안 미국의 국가부채 규모는 9000억 달러에서 2조9000억 달러로 3배 이상 증가, 당시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함께 누적되는 ‘쌍둥이 적자’가 시작됐다.
또 부유층을 위주로 한 감세 정책으로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며 사회양극화를 초래했다. 레이건의 임기 초 미국 순재산의 8%를 갖고 있던 최상위 1% 부자의 재산이 임기 말에는 12%로 늘어난 반면 복지예산 삭감으로 많은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집권 당시의 업적으로 호평 받은 물가안정조차도 레이거노믹스 때문이 아닌, 달러 강세와 유가 하락에 따른 해외상품 수입 증가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레이거노믹스의 중심 내용은 ▲정부 지출의 축소 ▲노동과 자본에 대한 소득세 한계세율을 낮춤 ▲정부 규제의 축소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한 화폐 공급량의 조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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