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수의 꽃댕이 일기②] 신공덕동서 제천 함허재에 띄우는 눈꽃 편지

[아시아엔=홍승수 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사람이 나이가 들면 뻔뻔해진다고들 합니다. 요즘 저는 자신의 일상을 딸이나 아들, 또는 손주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가까운 이웃, 오랜 외우, 좋아하는 동료, 존경하는 선ㆍ후배, 친척 들에게 공개합니다. 70년 넘게 도회지에서만 살다가 갑자기 연고가 없는 산골로 들어왔다고, 이분들이 저희의 제천생활을 무척 궁금해 하십니다. 저희 잘 있다고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일상을 공개하는 데에는 더 깊은 뜻이 있지 싶습니다. 이분들이 저희 둘의 건강을 염려하고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생활의 단면이라도 보고 드려야 할 ‘의무’ 같은 걸 의식합니다. 그렇더라고 해도 저의 일상을 이렇게 시시콜콜 공개한다는 건 제가 그만큼 뻔뻔해졌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AsiaN>의 이상기 대표께서 제 얼굴에 두꺼운 철갑을 씌우기도 했고요.

몇 분은 제 편지글을 읽고 답을 주십니다. 공존의 권 기호 사장이 그런 분입니다. 권 사장님 글과 제 답장을 소개합니다.

홍 선생님께,

요즘 편집하고 있는 책에 심사정과 정선의 작품을 넣어 운치를 돋우려던 차에, 그 작품들이 구현된 실제 세계를 보여주시니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서울은?하루 종일 내린 함박눈이 모두 녹아 이제는 빙판으로 얼어가고 있습니다. 한낮에는 문득 그 눈을 바라보며 ‘지금 내리고 있는 저 눈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때 바로 ‘무한대의 무한대’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유한한 것들뿐이니,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인간의 사고력이 고맙기만 합니다.

보내주신 작품들을 산이와 솔이에게 보여주었더니, 산이는 산이 많이 보이는 “승수 옥녀봉으로 향하다”가 좋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눈사람 만들고 싶어요”라고 했고, 솔이는 “겸재 함허재에 앉다”가 좋다고 하면서 “눈싸움 하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아마 저 눈들은 이번 겨울 내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으니 좀 늦게 가서 첫 눈 인사를 나누더라도 그리 책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인쇄할 때 흰색 잉크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인쇄소에 따라 흰색 잉크 자체가 없는 곳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가끔 색지에다?흰색으로 뭔가를 표현하려고 하면 인쇄소에 흰색 잉크가 없다고 하니 흰 종이에 원하는 만큼만 흰색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색을 입혀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온갖 색으로 현란하지만 문자가 사는 세상은 대부분 흰색으로 깔끔하고 단조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허물은 쉽게 세상 속에 묻히지만 문자의 허물은 쉽게 눈에 띕니다. 허물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일 수 있고 말입니다.

빛의 3원색을 합하면 흰색이 되고, 색의 3원색을 합하면 검은색이 되는 것 또한 신기한 노릇입니다. 물리학으로 기본?설명은 할 수는 있겠지만, 물질이 아닌 것은?섞여서 흰색이 되고 물질은?섞여서 검은색이 되는 것은 또다른 다양한 비유와 상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저 불가지(不可知) 안에서 가지(可知)를 논할 따름입니다.

이번 성탄에도 눈길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공덕동에서

솔, 산, 유리, 기호?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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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님,

난 산ㆍ솔의 아버지 편지를 받으면 가슴이 설렙니다. 짧은 편지글에서?깊은 사색의 내공이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불가지 안에서 가지를 논한다’고 하기 보다 가지에 발 돋움하고 불가지를 넘보는 능력이 사람에 있지 싶습니다. 그게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아닐까요. 주시는 글이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기호 님의 글을 읽으면 공존이 곧 세상의 빛을 받게 될 터인데 하는 기대와 바람이 치솟곤 합니다.

내가 다닌 경복중고등학교 자리가 인왕과 금강을 많이?그린 겸재 정선 어른의 집터였습니다. ‘인왕제색도’가 여기서 태어났지 싶습니다. 나는 금강산에서 태어나 인왕산의 품 안에서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나 자신은 내 의지와 무관한 이 운명의 선택을 하늘이 주신 엄청난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산이와 솔이가 자기 생각을 공글리어 저렇게 똑 부러지게 표현할 수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산이야, 솔이야, 오늘 밤 좋은 꿈꾸며 잘 자거라.”

오늘?아침에 순천 금둔사 지허 큰스님께서, 하양에 대한 나의 억지를 보시고 이런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지고의 진리는 형상이 없어 눈으로 내리겠지요. 말로 다 할 수 없어 눈이 돼서 내리지요.”?

괴테가 어떻게 빛에 대해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여기저기 읽다보면 이 양반이 빛에 대하여 연구를 많이 하셨더라고요.

그럼 또,

함허재 초옹 총총

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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