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 생각] 한팔 없는 시조시인 김하루 “‘자뻑’ 해도 실망할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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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어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45년만의 만남이었습니다. 얼굴은 물론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동창이었습니다. 다른 친구의 부름에 천호초교 모교와 멀지않은 광장동의 족발집에서였습니다. 그는 한눈에 저를 알아보는 것 같은데, 저는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흰 점퍼를 입고 있는 그의 오른팔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2년반 전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사고가 나 팔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서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6학년때 같은 반이었더군요. 1969년, 그 당시 교실엔 90명 이상, 전체 14개 반이 있었습니다. 방진욱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그 친구도 정확히 성함을 기억했습니다. 아주 공평하셨던 분이죠. 학생들 차별하지 않고, 특히 성적은 시험점수대로 줄을 서게 한 후 앞에서부터 수우미양가를 매겼습니다. 교실이 소란스러우면 운동장에 집합시켜 ‘선착순 달리기’를 시켜 벌을 주었던 분이라는 것도 그 친구와 함께 기억해 냈습니다.

1970년 2월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장래 소망을 발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3분의 1 가량은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집에서 놀거나 공장을 다녀야 했습니다.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는 친구들은 “요꼬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후 그 친구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지난 저의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그때 그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들이 공장에서 일해준 덕분에 내가 대학까지 공부하고 이렇게 내 아들을 키워왔구나’ 생각하니 콧등이 시려왔습니다.

어제 만난 친구가 책을 한 권 줍니다. 시조집이었습니다. 그가 작년 봄 낸 것이었습니다. 제목이 재밌습니다. ‘자뻑’. 그에게 싸인을 부탁했더니 이렇게 써주었습니다. “세상 최고의 친구 이상기에게. 2015 왕창 여름 김성찬 드림” 거기다가 그림도 덧붙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시호(詩戶) ‘하루’를 뜻한다며 2년 남짓 쓰기 시작한 왼손으로 또박또박 그려줬습니다.

자정이 다 될 무렵 광나루역에서 시인 김하루는 상일동행, 저는 왕십리행 5호선에 올라 헤어졌습니다. 불콰해진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나자곤 했지만, 언제 또 만날 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자뻑>을 펼쳤습니다. 부제가 ‘훔친 시간들의 시’로 붙어있더군요. 서문에서 김하루(김성찬) 시조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고 세상 모든 것과 이별할 수 있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던 시조 시인 김하루, 나 김하루가 삼키고 뱉어낸 경험의 글이라 조금은 낯설 수도 있으나 단시조집에 수록된 한 편, 한 편은 내 잘난 얼굴이라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시집 뒤에 ‘자뻑’이 1, 2편 실려 있고 맨 뒤엔 친구의 후기가 나옵니다.

자뻑 1

난 아직

세월 떠돌이

휑한 웃음 계절 싣고

 

한 발짝

앞서가는

놓친 시간을 잡아끈다

 

넘치게 인생을 낭비한 죄

 

시詩 속에

숨어 산

 

죄.

소줏잔 나누며 “책 제목이 하필 자뻑이냐?”고 물었더니 말이 없던 그의 답을 후기에서 발견했습니다.

“난 오늘도 내가 쓴 시를 지켜보며 한없는 자뻑을 해댄다. 자뻑. 자뻑. 낮을 밤 삼아. 밤을 낮 삼아.”

한 팔 없는 씩씩한 시조시인 김성찬과의 짧은 만남이 긴 여운을 제게 남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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