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청년·고령층 일자리 문제, 이렇게 해결하자
[아시아엔=김인자 한국심리상담연구소장, 서강대 명예교수, 국제 긍정심리학회(IPPA) 창립이사] 청년 일자리 창출과 고령자들의 활동영역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도 많다. 그 중에는 특히 개인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좋다며 각종 심리·성격검사, 지능검사, 직업적성검사 등의 다양한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물론 그런 방법들은 자신과 타인의 특성 이해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자료에 의존하는 것 보다 우리에게 우선적이고 절대적으로 절실한 게 있다고 본다.
우선, 청년 실직자는 없다. 실직은 하던 일을 잃게 되었다는 뜻인데, 일도 해보지 않은 그들이 어떻게 실직자인가? 청년 구직자라는 호칭이 적절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바람직한 일의 가치나 그 뜻을 이해하기보다 일을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풍요에 연결시켜 그에 맞지 않는 일이면 기피하려는 태도를 고집하기 때문에 일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파괴적인 것이 아닌 한, 그 일에서 자기 특성을 발견해 추구하면 반드시 자기 적성을 크게 발휘할 기회가 반드시 찾아온다.
이 세상에 나에게 꼭 맞는 배우자, 친구, 부모, 가정이나 사회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또 지금 맞는 것 같아도 언제까지나 나에게 맞는 일이나 삶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행복 행진’은 시작된다. 나는 이런 사실을 나의 삶, 특히 현대심리학과 상담 분야에서 거듭 확인하곤 한다.
미국의 31대 허버트 후버 대통령부터 지금의 오바마까지 대통령 9명이 아이스크림가게 종업원, 공사판 막노동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도 어린 시절 새벽신문 배달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필자는 유학시절 크리스마스 방학 때 시카고에 사는 후배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녀의 초등학생 남동생과 유치원생 여동생들이 새벽에 일어나 함께 신문뭉치를 묶어서 배달하면서 번 돈으로 ‘오키드’ 꽃 한 송이를 부모에게 선물하는 것을 보았다.
최근 별세한 필자의 남편은 1950년대 유학시절 3개월간의 여름방학 동안 뉴욕 록펠러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함께 했던 친구와 헤어지면서 서로 통성명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자신 이름이 ‘존 록펠러’라고 해서 “야, 이 집 주인이름하고 같구나”했더니 그가 “맞아 그 분이 내 할아버지야”라고 했단다.
‘봉사하기’나 일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며 가장 확실하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그것은 실제로 내가, 남에게 필요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윌리엄 글라써가 말하는 사랑·성취·자유·즐거움·생존의 욕구가 모두 충족될 수 있는 ‘심리적 부(富)’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강연을 하던 끝에 한 젊은이가 내게 물었다. “교수님은 어떻게 1950년대에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어떻게 서강대 교수가 되셨습니까? 그리고 80세가 한참 더 되셨는데도 어떻게 일을 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을 받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되돌아 봤다. 나는 그에게 “나를 혹시 일 중독자로 보았냐”고 반문하면서 아래와 같이 답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물고물 작은 집안 일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하기를 좋아했다고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6.25 직 후 우리 모두는 일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영어를 좀 하고 타이프를 칠 줄 알면 일자리 구하기가 쉽다고 들었다. 영어는 좋은 말귀나 격언 같은 것을 하루에 하나씩 외우고, 타자학원은 1주일만 가서 글자 키 위치와 기계작동방법만 배워 와서 이불 위에서 키 위치 외우기 연습한 실력으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어찌어찌 하면서 몇 군데를 거치고 마침내 영등포에 있던 미군 병원에 취직했다. 매일 퇴근 시간 후 약병도 닦고 타자연습도 했다. 실험실에서 슬라이드 만드는 일과 마이크로톤에 필요한 칼 갈기 등을 자진해서 도와주곤 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타자연습을 하고 있는데 한 의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Sure!’하고 따라갔더니 큰 쇠문을 열고 들어가서 흰 보를 씌워 놓은 데로 가더니 그가 시체해부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6.25전쟁의 참상을 경험은 했지만 멸치 똥집도 발라본 적도 없었다. 그 때 너무 놀라고 겁에 질려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의사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을까 생각하고 덜덜 떨면서 참고 도와주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때까지 보고서 작성을 고치고 다시 고치면서 도와주었다. 나는 그 후 3일간 아무에게도 불평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홀로 끔찍하게 무서워했다. 그러나 그 후 나의 성실성과 참을성에 대한 칭찬은 대단했다. 마침내 그 소문이 그 당시 미8군사령관 막스웰 디 테일러 장군에게 전달되어 그가 나에게 미국행 비행기 값을 대주고 많은 장병들이 후원금을 걷어주어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마칠 때까지 매달 20달러의 용돈을 보내준 이도 있었다.
두번째 행운은 이렇게 찾아왔다. 나의 특성과 상관없는 일을 해야 했지만 그 일에서 나의 특성을 잘 적용한 것 같다. 1958년 귀국하고 나는 병원 실험실에서 일하면서 언젠가는 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대, 가톨릭대 그리고 을지로 6가 국립병원에서 나의 전공과 나의 병원 실험실 경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그들이 외국 재단으로부터 원조 받은 실험실용 약품과 도구는 그들의 병원 창고에 쌓여 있었지만 내가 봉사하겠다고 해도 거절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오전에는 콜롬바노 사제들로부터 타자 일거리를 맡아왔고, 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다. 또 오후에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하루는 내가 한국말을 가르치는 교실에 외국인 신부들 서너 분이 들어와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를 지켜보던 신부님들이 강의가 끝나자, 그 자리에서 서강대학교에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나는 유학시절에 전화국 ‘교환대’에서 일했었고, 타자도 잘 칠 수 있다 했더니, 아니 교수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세 번이나 거절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내 서강대 Faculty직을 수락했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든 환경조건에 나의 특성으로 최선을 다하면 나에게 맞는 일자리가 나를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녀나 청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가르쳐주어야 할 것은, 어떤 성적으로 어떤 대학을 가서 무엇을 전공해야 하고 졸업 후 자신에게 맞는 환경 조건을 찾게 하기보다, 어떤 환경조건에서라도 자기 강점과 특성을 창의적으로 정성들여 발휘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훨씬 쉽고 확실하게 행복이 보장되는 길임을 믿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을 믿게 할 수 있을지는 풀어야 할 숙제이다. 청년들에게 행운의 열쇠 찾기에 도움이 되는 말을 몇가지 제시한다.
첫째, 행운은 언제나, 혹은 자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시시한 일 뒤에 숨어있다는 것을 청년들이 믿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둘째, 가치 있는 일이면 돈과 연결짓기보다 자기 능력발휘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웃이 하는 대로 하면 결과는 그와 같거나 그보다 못하게 나온다.
셋째, 매일의 삶에서 ‘일하기’도 연습을 해야 달인이 된다. 다만 창의적으로 투자한 만큼 이익이 난다. 인생은 메아리, 나에게 반드시 되돌아온다.
넷째, 그래서 우선적으로 우리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여생 젊은이들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자는 남은 시간과 힘으로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고 따뜻한 정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 많고도 많다. 우리 고령자가 함께 그 일을 하려고 오늘도 최선으로 일하고 기도해야 한다. “나의 최선이 그대의 최고가 되소서”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