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5일] 지구촌 청춘 달궜던 스코피언스 역사 속으로

2010 후세인 심복 ‘케미컬 알리’ 사형 집행

2010년 1월25일 사담 후세인의 악명 높은 심복이었던 알리 하산 알-마지드 전 이라크 남부군 사령관이 처형됐다. 이라크 정부 대변인은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화학무기를 이용해 양민 학살을 주도, ‘케미컬 알리(Chemical Ali)’로 불리는 알리 하산 알-마지드에 대해 이날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이날 사형 집행은 네 번째 사형 선고를 받은 지 8일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후세인 전 대통령의 사촌 동생인 알-마지드는 1988년 이라크 쿠르드족 마을인 할아브자 지역에서 화학가스 공격을 명령, 양민 5000여 명을 숨지게 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같은 달 17일 네 번째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알-마지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당시 이란과 접경 지역인 할아브자 주민들이 이란의 간첩 노릇을 한다며 무차별 화학무기 공격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2007년 6월. 1987년부터 1년 간 전개된 ‘안팔(전리품) 작전’을 진두지휘하며 18만 명에 이르는 쿠르드족 양민 학살에 개입한 혐의였다. 두 번째 사형 선고는 2008년 12월로, 1991년 시아파 봉기 당시 내무장관으로서 10만 명 학살에 관여한 혐의였다. 세 번째 사형선고는 2009년 3월에 받았으며, 1999년 시아파 탄압을 위해 주요 도시에 군대를 파견, 수십 명을 숨지게 한 혐의가 인정됐다.

2010 록밴드 ‘스코피언스’ 45년만에 해체

2010년 1월25일 독일의 세계적 록밴드 스코피언스(Scorpions)가 결성 45년 만에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스코피언스의 창단을 주도했던 기타리스트 루돌프 솅커(당시 61세)는 이 날짜로 발간 된 독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룹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고 밝혔다. 보컬 클라우스 마이네(당시 61세)는 “우리는 더 이상 젊어질 수 없다. 멋진 앨범을 낸 후 마음 가는 대로 살고자 한다”면서 “우린 록밴드로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다”고 말했다.

‘홀리데이(Holyday)’와 ‘올웨이스 섬 웨어(Always somewhere)’, ‘스틸 러빙유(Still loving you)’ 등 2~3세대에 걸쳐 많은 음악적 영감을 심어준 ‘전갈’ 스코피언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선율은 영원히 남아있다.

1981년 중 법원, 마오쩌뚱 부인 강청(江靑) 사형 판결

“나는 모 주석의 충견이었다. 그래서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을 뿐이다.”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뚱의 3번째 부인 강청(江靑`1914~1991)이 1981년 1월25일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묻는 중국 법원에 한 말이다. 사형 판결을 언도받자 그는 “혁명 무죄!”라고 외쳤다.

강청의 본명은 이운학(李雲鶴)이었으나 15세에 산동실험극원에 입학, 훗날 배우로 활동할 때는 ‘남평’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33년 19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청도대학 도서관 직원을 하며 문학적 교양을 쌓고 이후 연안에 도착해 이름을 ‘강청’으로 또 바꿨다.

마오쩌둥과의 운명적 만남은 1937년 연안에서 24살의 강청이 ‘타어살가’(打漁殺家)의 주연을 맡아 공연했을 때였다. 이미 4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지만 45세로 두 번째 부인까지 있었던 마오쩌둥은 강청에 빠져들었다. 마오와 맺어진 강청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본격적인 정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해 문화혁명기간동안 극좌사상을 선동, 1969년 중앙정치국 위원이 됐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측천무후나 여후(유방의 첫째 부인)에 비견될 정도였다. 마오쩌뚱 사후 주도권 장악을 위해 1973년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과 사인방을 구성, ‘강청 당주석, 장춘교 수상’계획을 준비하던 중 화국봉 등에 의해 적발돼 숙청, 재판에 회부돼 1981년 오늘 반혁명분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뒤 무기형으로 감형됐고 1991년 5월 14일 병 때문에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던 중 자살했다. 77세였다.

1947년 ‘밤의 대통령’ 알카포네 사망


1947년 1월25일 미국의 전설적인 폭력조직 두목 알폰소 가브리엘 알 카포네(Alphonse Gabriel Al Capone)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이는 매독과 폐렴합병증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발효된 금주법 시대에 시카고를 주무대로 활동했던 폭력조직 두목인 알카포네는 뉴욕 시 브루클린 태생이며, 남부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이끌었던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은 미국서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조직으로 성장했다.

‘밤의 대통령’이란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보스 자리를 차지한 1927년에는 ‘한 해 총수입이 1억 달러(당시 가치)인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도박과 매춘, 밀주 등으로 거둔 수입이었다. 알 카포네는 그러나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와 함께 시카고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악명을 떨친 것은 다른 갱단과의 싸움. 아일랜드계 조직원 7명을 기관총으로 난사한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을 비롯해 300명 이상을 죽였다. 불법과 살인에도 그는 무사했다. 검은 돈을 먹은 정치인과 경찰의 비호 덕분이었다.

그러나 1932년 ‘탈세’ 혐의로 체포돼 알카트라즈 섬에서 7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1939년 출소 당시 이미 폐인이었던 그는 1947년 1월25일 초라하게 숨졌다. 알카포네 사후에도 마피아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금주령이 사라져 밀주는 없지만, 마약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33년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태어난 날

“화해는 정의로서 뒷받침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원하지만 그 평화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칙과 정의에 기초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1933년 1월25일 탄생한 필리핀의 정치가 코라손 아키노(Aquino, (Maria) Corazon) 전 대통령이 한 말이다. 아키노는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 대통령으로서 필리핀을 이끈 정치가다.

마르코스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의 미망인으로서, 남편이 암살당한 뒤 야당을 이끌었다. 1986년 2월 연합야당의 후보로 출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87년 아키노 정권은 새 헌법에 의한 국민투표에서 압승, 토지개혁안 입법과 공산세력 유화책 실시 등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막대한 외채와 경기 침체, 정치 내분, 자연재해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90년대 초 들어 지지도가 크게 떨어졌다.

1992년 아키노의 뒤를 이어 피델 라모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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