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2일] 버마 출신 우탄트 UN사무총장
2009 중국, ‘멜라민 분유’ 주범 사형선고
중국 사법당국은 1월22일 영아 6명이 숨지고 30만여 명이 입원한 ‘멜라민 분유’ 사건의 주범들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중국 허베이(河北)성 스자좡(石家莊)중급인민법원은 이날 ‘멜라민 분유’를 생산하고 판매해 공공안전을 위험에 빠뜨린 피고 12명에 대해 1심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에서 멜라민 분유 사건의 주범 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명은 사형에 집행유예 2년, 3명은 무기징역형, 나머지 6명은 징역 5년에서 15년형을 받았다.
법원은 멜라민이 든 단백질 분말을 생산하고 판매한 장위쥔(張玉軍)과 멜라민 분유를 유제품업체들에 공급한 낙농업자 겅진핑(耿金平)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멜라민 분유를 생산한 유제품업체 싼루(三鹿)사의 톈원화(田文華) 전 회장과 장씨로부터 멜라닌 분유를 구입해 되판 장옌장(張彦章)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와 함께 가오쥔제(高俊杰)에게 사형과 함께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으며 다른 공범 3명에 대해서도 범죄 정도에 따라 징역 5년형부터 15년형을 내렸다.
중국 위생부는 지난해 공업용 화학원료인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먹고 영아 6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29만6천명의 어린이들이 신장결석이나 배뇨 질환을 앓았다고 밝혔다.
BBC는 이날 구형 소식을 자세히 전하면서 “중국 정부의 재발방지 약속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가족 등은 수사결과의 투명한 공개 미흡, 공적 책임, 공직사회 부패 등으로 같은 독극물 사고가 재발되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07 정명훈, 일본 왕세자와 협연
2007년 1월22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 2007’이 도쿄에서 열렸다. 세계적 음악가인 정명훈씨와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 중국의 대표적 첼리스트 초우칭, 일본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가시모토 다이신,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수석연주자 안동혁씨 등 3국의 연주자 5명이 이날 오후 도쿄 산토리홀의 무대에 함께 선 것이다.
이날 협연에서 정씨는 피아노를, 나루히토 왕세자는 비올라를 각각 연주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일본 왕실 가족들이 다니는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시절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수석을 지내는 등 클래식 애호가다. 한·중·일 우호를 위한 음악회로, 객석에는 3개국 어린이 170여 명이 초대됐다.
좋은 분위기는 그러나 행사 때 뿐이었다. 일본의 아베총리가 몇 주 뒤인 3월1일 종군위안부의 강제동원을 부인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또 얼마 안 돼 일본 관방 부장관이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위안부는 부모가 딸을 판 것”이라면서 국가의 위안부 강제동원사실을 부인하는 발언으로 일본 고위층의 ‘망언’은 절정을 이뤘다. 일본 왕실은 클래식 협연보다 ‘사죄’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라는 여론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비등하다. 아시아권 신문 아시아엔(The AsiaN)은 ‘일왕이 사과할 때까지’라는?기획기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1923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진 김상옥 의사, 자결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 한명이 1923년 1월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수백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김상옥 의사였다.
김상옥 의사는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와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의사는 결국 일경에 포위돼 대치하던 중 체포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1909년 버마 우탄트 전 UN사무총장 출생
1909년 1월22일은 우탄트(U Thant) 전 유엔 사무총장이 출생한 날이다. 1928년부터 1947년까지 저널리스트와 교사로 생활했다.
식민지주의에 강한 반대 입장을 내세웠으며, 1947년에는 미얀마신문 사장, 이듬해 방송국장이 됐다. 1957년 유엔 주재 버마 대사와 알제리 문제에 관한 아시아 그룹 상임 위원회 위원장, 콩고 위원회 위원, 유엔 자본개발기금 설립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1961년에 다그 함마르셸드 당시?하마슐트?유엔 사무총장이 비행기 사고로 죽자?유엔 사무총장 후임으로 임시총장이 됐다가 이듬해 정식 UN사무총장이 된다. 냉전의 시기였지만 버마가 비동맹운동을 주도하는 중립적 위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1971년까지 UN사무총장을 지냈다.
그는 10여년 가까이 사무 총장직을 역임하면서 쿠바 위기, 카슈미르 분쟁, 베트남전 등 국제 분쟁 문제 해결에 힘썼다. 그 공로로 후에 네루상을 수상하게 된다.
1974년 11월 25일 뉴욕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양곤으로 옮겨졌으나 공항에는 의장대는커녕 관리 한명 보이지 않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장군이 그를 싫어했기 때문.
장례식에 수만명의 시민이 몰려나왔고 정부의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관을 탈취하는 등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불교도였던 결국 그는 버마와 흥망성쇠를 함께 한 대표적인 인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