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1일]사회주의 혁명지도자 레닌 사망

2011년 아덴만의 여명 작전 성공

2011년 1월 21일 청해부대 용사들이 인도양 아덴만에서 감행, 승전보를 보내왔다. 한국 군함 최영함은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삼호주얼리호와 한국 선원을 무사히 구출했다. 작전명 ‘여명’.

우리나라의 청화부대 소속 해군특수전여단(UDT/SEAL)이 이날 한국 시간으로 오전 4시58분에 구출작전을 시작, 오전 9시56분에 끝냈다. 해적 13명 중에서 8명 사살, 5명을 생포했다.

윤연 전 해군작전사령관은 매일경제에 기고한 칼럼에서 “당황하지 않고 작전에 협조한 석해균 선장의 기지, 해군 특전부대 용사들의 프로정신, 청해부대장, 해군작전사와 합참의 합동작전 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작전성공요인을 분석했다.

1977년 카터 대통령 베트남 전쟁 징병기피자 사면

1977년 1월21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징병기피자들에게 국민화합차원에서 조건부 또는 전면적 사면령을 내렸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1973년 이후 4년만의 일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약 10만명의 미국 청년들이 전선 투입을 앞두고 캐나다로 일종의 ‘망명’을 했다. 징집영장을 받기 전에 미리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고, 영장을 받은 뒤 입영하지 않거나 입영 뒤 부대를 이탈해 국경을 넘은 사람들도 있었다. 캐나다에 도착 직후 이들은 정당하지 못한 전쟁을 피해 건너왔다고 주장, 난민 자격으로 영주권을 얻어 정착했다. 여러 해 뒤 미국 정부의 사면을 통해 일부는 돌아갔고, 나머지는 아예 캐나다인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들 ‘청년 망명객’이 과연 양심의 결정에 따라 영원히 고국에 못 돌아갈 것을 각오하고 이국살이를 택한 용기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중대한 시기에 국민의 의무를 팽개친 비겁한 사람인가 논쟁이 뜨거웠다.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그 다양성을 반증한다.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전쟁저항자(war resister)’라고 부른다. 반면 베트남전을 지지한 미국인들, 특히 참전자와 그 가족들은 이들을 ‘비겁자(coward)’라 단정한다. 미국 정부는 법률적인 면에서 이들을 ‘징병기피자(draft-dodger)’와 ‘탈영자(deserter)’로 구분해 불렀다. 캐나다에서는 이들을 ‘징집연령이민자(draft-age immigrant)’라고 점잖게 부르기도 했으나 언론매체는 보통 ‘신종난민(new refugee)’이라고 호칭했다.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전 기피자와 탈영병을 사면함으로써 캐나다에 온 신종난민들 중 절반가량은 길게는 10여년, 짧게는 수년간의 이국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갔다. 캐나다 잔류를 택한 사람 중 상당수는 지금 지도적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1968 북한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 습격 기도

1968년 1월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장 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다. 1?21시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는다. 한국군 복장과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18일 자정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야음을 틈타 남한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그러나 청운동 세검정고개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난다. 곧바로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1월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돼 작전이 종료됐다.?

생포된 김신조는 나중에 대한민국에 귀순,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서울성락교회 목사가 됐다.?

1924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 사망

1924년 1월21일 레닌이 고리키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레닌은 계급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당의 지배를 강화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 이후 레닌은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赤衛隊)를 조직,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청사를 함락시켰다.

소비에트 의장에 선출된 레닌은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약속했으며,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국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 근본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실용적인 혁명노선을 선택, 혁명을 성공시킨 이념으로 세계 각국에 큰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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