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9일] 일본 전공투 주도 도쿄대 시위 진압되던 날
1991 모스크바서 발트3국 독립요구 시위
1991년 1월19일 모스크바 시내는 수만 명의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찼다. 시위 참가자들은 발트3국의 독립요구를 외면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비난했다. 1940년 소비에트연방에 강제 편입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3국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본격화되자 분리 독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며칠 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발트3국은 그해 9월 기어이 독립을 쟁취했다.
1990 아제르바이잔 국민, 반아르메니아 시위
1990년 1월 19일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수도 바쿠에서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아르메니아인을 비난하며 시위를 벌였다. 석유 대국인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국가로, 기독교 전통이 강한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오랜 갈등을 겪어 왔다. 1923년까지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이 아제르바이잔으로 귀속된 이래 인종과 종교로 인한 분쟁이 계속됐다.
1988년 본격화 된 분쟁이 격화돼 대량 학살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지난 2011년 3월 현재까지 3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충돌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 영토가 확실한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은 아르메니아계 분리주의자들이 점령해 끊임없이 인명살상 행위를 하고 있다.? 소년을 사살해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중재에 나서기도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지난 2011년 11월20일에는 아제르바이잔 군이 아르메니아 병사 1명을 사살했다.
1990? 인도의 구루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 사망
1990년 1월19일 인도의 구루 바그완 슈리 라즈니슈(아차리아 라즈니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가 사망했다. 59세. 구루는 주로 인도의 영적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무겁다’는 뜻이라고 한다. 만년에는 ‘오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본인 주장에 따르면 라즈니슈는 22세 때인 1953년 3월21일 ‘깨달음’을 얻었다. 1960년대에 철학 교수로서 인도를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힌두교와 자이나교, 선불교, 도교, 기독교에다 이런저런 철학적ㆍ심리학적 전통과 명상 요법들을 결합한 신비주의적 가르침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사회주의와 마하트마 간디 및 기성 종교에 반대하고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지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970년 오쇼는 제자를 받으며 정신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온갖 추문에 시달렸다. 1987년 사실상 미국으로부터 추방돼 인도로 돌아온 지 세 해 만에 죽었다. 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자신을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라 불렀고, 1989년에 ‘오쇼’라는 이름을 새로 택하여 그 뒤로는 주로 오쇼 라즈니쉬로 불린다.
라즈니슈는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추종자들에게 ‘위대한 스승’이었던 그는 비판자들이 보기엔 사기꾼이자 호색광이었다.
1983 애플, 최초 PC 애플 리사 발표
1983년 1월19일 애플 컴퓨터가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춘 최초의 상업적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 리사를 발표했다. 제프 라스킨과 스티브 잡스는 1979년 제록스 PARC에 방문, 최초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기반 컴퓨터인 알토(Alto)를 본다.
제록스는 제록스 PARC에, 애플이 주식을 공개상장하기 전에 100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3일간 애플 기술자들이 제록스 PARC에 접근하는 것을 허가했다. 스티브 잡스는 여기서 미래의 컴퓨터에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Use Interface)’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플의 차세대 컴퓨터 프로젝트였던 애플 리사(LISA)에 이를 적용하기로 했다.
애플 리사는 1983년 GUI(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적용된 최초의 개인 컴퓨터로 소개됐다. 하지만 리사는 9995달러에 이르는 높은 가격과 제한적 소프트웨어 때문에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이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경영 내분으로 그룹에서 밀려났다. 덕분에 제프 라스킨은 저가 컴퓨터 매킨토시를 꽃피울 수 있게 됐다.
‘리사’라는 제품 이름과 관련해 잡스는?대반전을 보여줬다. 그의 사후에 발간된 책에 그 대반전이 잘 소개돼 있다.
“잡스가 이 새로운 컴퓨터의?이름으로 택한 단어는 경력 많은 정신과 의사도 깜짝 놀라서 다시 들여다볼 만한 것이다. 그 이름은 ‘리사(LISA)’였다. 당시 많은 컴퓨터들에는 그 설계자의 딸 이름이 붙곤 했다. 그런데 리사는 잡스가 버리고도 자신의 자식임을?인정하지 않은 딸의 이름이었다. “어쩌면 죄책감에 그 이름을 택했는지도 모르죠.” 레지스 매케나 회사의 홍보 전문가로 리사 프로젝트의?홍보를 담당했던 안드레아 커닝햄은 말한다.
“잡스의 딸 이름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는 리사가 어떤?어구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인지 생각해 내야 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 중의 하나가 ‘지역 통합 시스템 아키텍처(Local Integrated Systems Architecture)’였다. 별다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말임에도 그들은 이 어구를 리사의?공식적인 뜻으로 삼았다. 하지만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리사는 ‘엉터리로 창조한 머리글자(Invented Stupid Acronym)’로?통했다. 훗날 내가 그 이름에 대해 물어보자 잡스는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분명히 그건 딸 이름을 딴 겁니다.”
1969 전공투의 도쿄대 시위 진압된 날
1960년 1월19일 오후 5시 45분. 마침내 최후의 1명이 검거됨으로써 1년을 끌어온 ‘도쿄대 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일본은 헬멧과 곤봉으로 상징되는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1968년 의학부 파업으로 시작된 도쿄대 투쟁은 그 절정이었다. 도쿄대의 상징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학생들은 전공투(全共鬪·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를 결성하고 외부의 접근을 차단한 채 그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었다.
‘자기부정’과 ‘도쿄제국대학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며 장기전에 돌입하자 1969년 1월18일 수천 명의 경찰이 강당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최루탄을 쏘며 진압했으나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사건으로 도쿄대는 1969년도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했고, 이후 학생운동은 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하는 적군파를 불러왔다.
동경대 운동이 패배한 70년대 중반부터 ‘우먼리브운동’이라는 여성운동이 싹튼다. 또 ‘재일 아시아인’ 등 아시아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운동도 활성화됐다. 전공투와 사회당 좌파운동가 출신들은 생활협동조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신좌파 운동’의 산증인으로 일본 아시아 민중연대와 진보적 사회운동을 개척해 온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씨에 따르면, 일본 변혁운동 세력들은 가늘게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적군파의 테러식 투쟁은 국민들에게 변혁운동을 혐오하게 만들었고, 80년대 국수주의와 글로벌주의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일본 노동운동 우경화가 본격화 된 1990년대 초에는 미소냉전구도가 붕괴되면서 계급운동의 해체와 비정부기구(NGO)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를 일본 현지에서 벌이고 있는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있다.
1966 인디라 간디, 인도의 3번째 총리 취임
1966년 1월19일 인디라 간디가 인도의 제3대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민족주의 지도자이며 자주독립국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로서 당시 공보부장관을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정파간 타협에 의해 총리로 임명됐다.
그녀는 인도 국민회의당의 당수이기도 했으며,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후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75년 6월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 판정을 받으면서 의원직 박탈과 함께 6년간 정치활동 금지라는 위기를 맞았다. 그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정적들을 구속하고 국민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1984년에는 인도군에게 시크교 최대 사원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공격할 것을 명령, 45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크 과격파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까지 3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