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8일] 한국 이봉창 의사, 일왕에 폭탄 투척

2003년 항공기 사고 많았던 날

1996년 1월8일 아프리카항공(Air Africa) 소속 안토노프 An-32 항공기(실제 소유는 Moscow Airways)가 콩고 응돌로(N’Dolo) 공항에서 이륙도중 속도가 나지 않아 이륙하지 못하고 활주로를 벗어나 시가지로 난입, 약 350명 사망했다.

7년 뒤인 2003년 1월8일 터키항공(Turkish Airlines) 소속 634편 항공기(Avro RJ100)가 터키의 디야르바키르(Diyarbakir) 공항 인근에 추락해 탑승자 80명 대부분 사망하고 5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항공기는 매우 짙은 안개 속에서 공항 활주로로 접근하던 중이었다.

같은 날 에어 미드웨스트(Air Midwest) 소속 5481편 항공기(Beechcraft 1900D)가 샬롯더글라스 공항을 이륙하던 중 사고로 탑승자 21명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사고 항공기는 항공기 부분 중 엘리베이터 작동에 문제가 생겨 조종사가 항공기를 제대로 조종할 수 없었다.

이 항공편은 US Airways 편명으로 운항 중이었다. 미국 항공편 중 국내선에 소규모 기종으로 운항하는 경우에는 예약은 메이저항공 편명을 달고, 실제는 군소항공사 비행기를 띄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1976년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사망

1976년 1월8일 오전 9시57분 당시 27년 동안 중국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가 7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방광암으로 고통 받아 오던 터에 맞은 죽음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중국 공산당 초창기부터 50년 이상이나 혁명동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저우 총리의 사망 소식에도 조문을 하지 않았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생애 최후까지 자신과 함께 해온 동지였지만, 마오 주석 자신이 폐와 심장 등에 이상이 있어 거처에서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오 주석에 이어 당 서열 2위였던 저우 총리에 대한 인민들의 신망이 너무 높아 그의 사후 직후에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저우 총리의 노선을 비판하는 주장을 했고, 그런 비판적 지식인들의 정치코드가 나중에 천안문 시위 등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저우 총리는 도쿄와 파리까지 유학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노선은 합리적이고 유연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36년 시안(西安)사건 때 장제스를 석방시켜 항일투쟁을 위한 국공합작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5·4운동 참여로 시작된 그의 혁명역정은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 창설, 상해 봉기 지도, 남창폭동 지도, 광주코뮌 조직, 대장정 참가, 항일연합전선 결성 등으로 이어졌고, 1949년 마침내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1932년 이봉창, 일본 왕에 수류탄 투척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1년 동안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 쾌락을 도(圖)키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을 목적하고 상해로 왔습니다.”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 이렇게 쾌활하게 인사를 건넨 이봉창은 꼭 80년 전인 1932년 1월8일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1919년 3·1운동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그는 1924년 도일, 일본을 극복할 방안에 골몰한다. 적을 알기 위해 적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 1931년 1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 가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다. 당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수뇌부의 암살을 포함하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결의하고 비밀독립운동단체 ‘한인 애국단’도 결성했다.

이봉창은 ‘한인 애국단’에 참여하면서 일본 천황 암살을 결심했다. 이봉창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의거 일로부터 만 57년 뒤인 1월7일 히로히토 일왕이 죽고, 이튿날 아키히토 현 일왕이 즉위한다.

그의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윤봉길 등의 의거로 이어졌다. 이봉창은 1932년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김구 선생은 1946년 6월 30일 일본에 있던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한국 정부는 이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와 사단법인 이봉창의사 기념사업회(회장 문국진)는 2012년 1월8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이봉창 의사 의거 8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18년 배고픈 열강의 고육책 ‘민족자결주의’

1918년 1월8일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의 3·1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전 세계 약소국에 큰 희망을 준 의제였다. 하지만 윌슨은 철학적으로 진보 대통령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이익에만 골몰한 지도자로 기록되고 있다.

1856년 12월28일 미국 버지니아 주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대 교수·총장을 지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이 공약한 고립주의 외교를 스스로 폐기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는 영국, 프랑스에 거액을 투자한 월가의 압력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순박한 조선 청년 김규식은 파리강화조약에 참석한 그에게 독립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그의 평화원칙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미국식 세계평화론’이었을 뿐이었다. 미국은 당시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미일 양국은 이미 대한제국 말엽에 일본과 밀약을 맺어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를 국제사회에서 추인 받고자 했다. 1905년 7월29일 일본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 수상과 이틀 전부터 장시간 회담을 해오던 미국 육군성 장관인 윌리웜 태프트는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고 합의했다. 이른 바 ‘카스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미국이 윌슨 대통령 재임 중에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것은 자신들의 먹거리가 다른 제국주의자들에게 모두 넘어가는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동원된 외교논리였다.

윌슨은 이와 함께 유색인종을 무차별 사살하는 ‘KKK단’을 숭고한 단체로 찬양한 정치인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흑백분리 정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여성 참정권도 무시했다. 그의 평등과 이상론은 미국 중산층 백인의 이익을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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