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7일] 문화혁명군에 무릎 꿇은 중국 제2대 국가주석

2010년 현지 교회 성탄절 앞두고 참극 빚어

2010년 1월7일 이집트에 거주하는 콥틱교회 신자들과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은 연중 최대의 축제일을 맞았지만 어느 해보다 끔찍한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해 10월 하순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 당시 콥틱 교도들이 이집트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사진 출처 : http://crisisproject.org/coptic-clashes-in-egypt-who-is-to-blame/>

정교회와 콥틱교회는 개신교, 가톨릭 신자들과는 달리 크리스마스(12월 25일)보다 13일 늦은 1월7일을 성탄절로 기념하고 있는데, 이들의 성탄절 이브인 그해 1월6일 이집트에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외신들은 최소 7명(현지인들은 20명 이상이라고 주장)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7일 성탄 전야를 기념하러 나온 콥틱교회와 정교회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던 이집트 남부 나가 하마디의 상가 지대에 무장괴한들이 탄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무장괴한들은 거리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기를 난사,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괴한들은 근처 가장 큰 교회로 차를 몰아, 미사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총기를 난사했다. 당시 이집트 당국은 7명 중 1명은 경찰관으로, 6명은 콥틱 교인으로 확인했다.

비잔틴 시대 콘스탄티노플의 지배 속에서 분열을 거듭하던 콥틱교회는 642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개종과 학살 위협, 불공정한 세금 부과 등 사회경제적 차별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이집트는 시리아 레바논과 함께 중동에서 기독교회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다. 콥틱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파 중 하나로, 이집트 교인 대다수가 콥틱 교회 신앙을 갖고 있다. 이집트 전체인구의 9% 정도가 콥틱교인이다.

이집트는 현재 헌법에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하고 있으며, 이슬람 교리를 모든 입법 활동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는 기독교인 부모가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등 기독교인에 대한 법적 차별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SBS 윤창현 기자(이집트 특파원)는 구랍 28일 보도한 기사에서 “콥트교도들은 예수의 발자취가 남겨진 이집트 곳곳에 교회를 짓고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해 왔지만, 1300년 전 이슬람문화가 전파된 뒤로 콥트교도들은 소수파로 전락해 온갖 박해와 차별을 당해 왔다”고 밝혔다. 또 “무까땀이라는 쓰레기 집하장이 있는 마을에 약 7만 명의 콥트교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등 이들 대다수는 지금도 이집트 사회의 하층민을 형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AFP는 2012년 1월6일 자정 무렵(이집트 현지시각) 송고한 기사에서 “2년째 신년하례를 하는 콥틱 교도들에 대한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이 올해는 없었으며, 이는 최초로 이슬람 세력과 협력해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1989년 일왕 히로히토 사망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1901년 4월29일 출생)가 1989년 1월7일 사망했다. 1926년 12월 제 124대 일왕에 즉위,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전범이었지만 전범재판에서는 면제됐다.

일본의 중국 침략과 진주만 공격 등을 미라 알고 있었을 정도로 제국주의 일본의 중심에 있었지만 일각에선 그를 군부의 허수아비로 여기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하지만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최고전범으로 여기고 있다.

히틀러는 베를린 함락 직전에 자살했고, 뭇솔리니는 해외로 탈출하려다 파르티잔에게 잡혀 사살됐다. 그런데 히로히토는 살아남았다. 왜일까.

주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전후 일본 통치를 위해서는 히로히토를 살려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에 구걸해서 왕의 목숨을 연명한 일본이 치러야 할 대가는 맥아더 옆에서 굴욕적인 자세로 사진을 한 장 찍어주는 것이면 족했던 것일까. 뒷짐을 진채 약간 짝다리를 짚어 거만스러워 보이는 맥아더 옆에 부동자세로 선 히로히토의 자세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물론 지구촌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아있다.

1971년 유럽을 방문한 히로히토에 대해 네덜란드와 서독 국민들은 날달걀 세례를 퍼부으며 히로히토와 히틀러를 합친 ‘히로히틀러’라고 조롱했다. 1984년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과거의 잘못을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가 사망하자 일본은 거국적인 추모 분위기를 조성했다. 언론은 히로히토의 업적을 찬양했고 일부에서는 추모 리본의 착용이 강요됐다. 당시 나가사키 시장이 ‘전쟁책임론’을 거론하는 등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미치광이와 같은 우익 민족주의의 함성에 이내 묻혀버렸다.

1979년 베트남군 공격에 무너진 폴포트 정권

1979년 1월 7일 베트남은 자국 국경을 공격하고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을 공격한 크메르 루즈(Khmer Rouge, 캄보디아 공산당)를 응징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침략했다.

베트남은 이를 통해 폴 포트 정권을 추방하고 친(親)베트남 정권(행 삼린 정권)을 세웠다. 크메르 루주의 부대는 캄보디아 최서단(最西端)의 타이 국경지대로 철수했다. 그 뒤 일부는 타이 국내에 군사거점을 설치하기도 했다.

미국 CIA가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론놀(Lon Rol)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는 무자비한 학살로 유명하다. 크메르 루즈의 중심에서 폴 포트를 인터뷰한 일부 종군 기자들은 당시 그들이 한쪽으로는 미국과 다른 한쪽에서는 베트남과 힘겨운 독립투쟁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이념인 공산주의를 실천하고자 불가피한 대량 인명살상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원시적이고 교조적인 공산주의 정책은 인민을 굶주리게 만들었고,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을 공격한 것은 그의 명분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하다.

1967년 홍위병에게 멱살 잡힌 중국 제2대 국가주석

1967년 1월7일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교조주의 노선을 따르는 홍위병들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날 친(親)마오파와 반(反)마오파로 나뉜 군중들이 중국 전역에서 유혈 충돌, 무려 10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마오가 1953년 한국 전쟁 휴전이후 1958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개혁과 협동농장사업을 중심으로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이 1960년부터 2년여 동안 이어진 대기근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당시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대규모 협동농장식 농업을 통해 직업과 성별, 연령, 교육 정도의 차이를 없애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험하던 당시 중국 민중들은 이런 실용주의노선을 반공산주의적 회귀음모로 받아들였다. 베이징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친(親)마오적 노선에 입각한 인민재판을 조직적으로 벌이고 있던 당시였고, 급기야 1월7일 전국적인 유혈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도 대대적인 숙청의 대상이 됐다. 중국공산당 문화혁명 소조의 지시를 받은 중공 중앙판공청 조직원들은 1월7일 밤 류사오치의 집을 급습, 중국 제2대 국가주석 류사오치의 멱살을 잡고 부인 왕광메이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류사오치 집의 청소부가 8가지 죄목을 열거하며 답변을 요구했다고 한다.(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숙청 이튿날인 1월8일은 문화혁명이 사실상 본격화 된 날이었다. 류사오치는 연금상태로 들어갔고, 베이징의 신화서점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사진과 책들을 쌓아놓고 소각하자 전국의 분점들도 뒤를 따랐다.

중앙정부에서 실각한데다가 당에서 제명당하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있었던 류사오치는 1968년 7월18일 다시 홍위병의 자택 습격을 받는다. 이날 습격에서 2시간 동안 폭행, 폭언을 당했다. 이후 난방도 되지 않은 가택에서 별다른 의료처치를 받지 못하여 당뇨병, 폐렴 등의 지병이 악화돼 1969년 11월12일 사망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했고, 1980년 류사오치의 명예는 회복됐다. 모든 당직도 복권됐다. 생전에는 마오쩌둥의 혁명을 방해한 인물로 규탄받다 사망했지만, 1981년 덩샤오핑에 의해 무죄로 인정됐다. 1987년의 발행된 중국의 런민비 지폐에는 마오,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4인의 ‘건국의 아버지’로서 초상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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