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 日왕궁에 폭탄투척 김지섭 열사

2010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25년형 확정

페루 대법원은 2010년 1월3일 알베르토 후지모리(당시 71세) 전 대통령에게 선고된 25년 징역형을 확정했다. 앞서 특별재판부는 지난해 4월 후지모리 전 대통령에게 살인, 납치와 학살 등 인권침해 사건의 “간접적 원인 제공자”라 판시하고, 인권침해 혐의로 2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후지모리는 일본계 이민 2세로 중남미 첫 아시아계 대통령에 당선된 신화적 인물. 1990년 대통령 당선 뒤 좌익 게릴라에 떨던 사회불안을 진정시키고, 고물가에 시달리던 페루의 경제발전을 이끌면서 서민층의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1996년 12월 좌익 게릴라조직 투팍아마루가 리마 소재 일본대사관에서 외교관 등 인질 72명을 넉달간 붙잡고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자, 반군 14명을 전원 사살토록 명령한 장본인.

게릴라 척결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한 독재자라는 비판도 만만챦다. 1991년 군대를 동원한 민간인 15명 살해, 1992년 학생과 교수 10명 살해, 1992년 의회해산, 1995년 4월 대통령 재선, 2000년 부정선거 논란 속 3선 성공 등이 그의 독재자 이력을 반증한다.

2000년 7월 부정선거, 횡령 등의 혐의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 뒤 일본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2005년 11월 칠레에서 검거돼, 2007년 9월 페루로 강제 송환된다. 페루 법원은 당초 그에게 징역 6년형을 선고했으나 추후 죄가 추가돼 대법원에서 25년 형이 확정, 2012년 1월 현재 복역 중이다.

2011년 6월 페루 대선 결선투표에서 우말라 현 대통령과 맞붙었던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 의원이 패했지만, 여전히 페루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남아있으며 우말라 현 대통령의 사회주의 성향에 맞서고 있다.

2009년 ‘독도 영토제외’ 일 법령 첫 발견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2009년 1월3일 “패전 후 일본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독도를 자국 부속도서에서 제외한 법령을 공포했다”고 발표했다. KMI 발표에 따르면 일본은 1951년 6월6일 공포한 ‘총리부령 24호’와 같은 해 2월13일 공포 ‘대장성령(大藏省令) 4호’에서 이 같은 내용을 찾아내 지난해 12월31일 청와대에 서면 보고했다.

‘총리부령 24호’는 조선총독부 교통국 공제조합 소유의 일본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제정한 상위법(정령ㆍ政令)을 시행하기 위해 세부 사항을 정한 것이다. 일본 ‘부속도서’에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 러·일간 분쟁중인 쿠릴열도(당시 표기로는 치시마 열도)와 하보마이 군도, 시코탄 섬 등도 제외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관할하다 1968년 일본에 귀속된 오가사와라 제도와 이오(硫黃) 열도도 빠져 있다.

연금 지급을 위한 이 특별조치법은 연금 지급과 관련해 호적법 규정의 적용을 받는 일본인을 본방(本邦ㆍ혼슈, 훗카이도, 시코쿠, 규슈)과 소관부처에서 정한 부속도서 등에 거주지가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KMI에 따르면, 법령으로 볼 때 일본은 적어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까지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은 1877년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ㆍ현 총리실)과 내무성이 “독도를 일본 영해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태정관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추강 김지섭 열사

일본이 법령을 제정하기 전 연합국최고사령부(GHQ)는 1946년 1월29일 지령(SCAPIN) 제677호 제3조에서 “울릉도와 리앙쿠르암(Liancourt Rocks, 독도), 제주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한편 1924년 1월3일 당시 일제 식민지시대 추강 김지섭 선생이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하고자 일본 왕궁과 가장 가까운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투척한 뒤 체포됐다.

188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금산지방법원 서기겸 통역으로 재직하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공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국독립 방안을 강구하다가 1920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한 이듬해인 1923년 국내에 잠입, 조선총독부를 파괴하려다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자 단신 니주바시 투척사건을 감행했다.

체포 후 1928년 44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5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04년 이집트항공기 홍해 추락, 탑승자 141명 모두 사망

2004년 1월3일 오전 2시 44분(한국시간 오전 11시 44분) 승객 135명과 승무원 6명을 태운 이집트의 보잉 737 여객기 한대가 이륙뒤 2분 만에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이 여객기는 홍해 연안 샤름 엘 세이크 휴양지에서 이륙해 카이로를 거쳐 파리로 향하던 중이었다. 카이로 주재 프랑스 대사관은 이날 프랑스 여행객들이 탑승한 이집트 여객기가 홍해에 추락했음을 공식확인했다. 승객들의 국적은 전원 프랑스인으로 알려졌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1월3일은 불운의 날인가? 1970년 1월3일 이스라엘 특공대가 이집트 해군기지에 침투, 이집트 병사들을 살해한 뒤?7t짜리 레이더를 분해해 헬리콥터로 실어갔다. 300km 반경의 저공비행기를 탐지할 수 있는 최신 소련제였다.

1924년 1월3일에 ‘파라오의 저주’가 시작된 때문인가. 그해 1월3일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박사가 고대 이집트 왕 투탕카멘 묘 발굴을 시작했다. 하워드 카터는 1922년 12월17일 훼손되지 않은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 1년여에 걸쳐 발굴준비 끝에 이날 전격 발굴에 착수한 것.

그러나 이날 이후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생겨났다.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20여 명이 2~3년 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카나번 백작이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기 직전 모기에게 물려 목숨을 잃은 것이 시작이었다. 카터 박사는 무덤에서 유물 1703점을 발굴, 카이로박물관에 소장했다.?<관련 기사=역사속 오늘 [12월17일]>

1979년 호텔 왕 힐튼 사망

세계 굴지의 호텔 체인을 설립한 미국의 실업가 힐튼(Hilton)이 1979년 1월3일 사망했다.

뉴멕시코 주 샌앤토니오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힐튼은 1915년 A.H. 힐튼 앤드 선 잡화점으로 사업에 뛰어든다. 주의회 활동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 소위 임관, 전쟁에도 참여한다. 1919년 최초 텍사스 주 시스코에서 모블리 호텔을 매입한 게 호텔사업의 시작이었다. 이어 댈러스·포트워스·웨이코·텍사스의 다른 도시 호텔들도 매입했다. 1930년대 대공황도 그를 막지 못했다.

1939년쯤 캘리포니아·뉴욕·일리노이와 그 밖의 지역에서 호텔을 건축·임대·매매했다. 1946년 힐튼호텔사가 설립됐다. 해외로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1948년에는 힐튼인터내셔널사가 설립됐다. 1954년에는 스태틀러 호텔 체인을 매입했고, 경영다각화의 일환으로 신용 카드업과 자동차 임대사업에도 뛰어들었다.

1960년대 힐튼사는 외국회사 및 정부와 공동경영하는 형태로 해외사업부를 재조직했다. 많은 힐튼 호텔이 프랜차이즈화 됐고, 힐튼 체인은 그들의 대주주다. 저서로<서슴지 말고 하세요 Be My Guest>(1957)·<호텔 경영자의 영감 Inspirations of an Innkeeper>(1963) 등이 있다.

힐튼은 지구촌 전체에 2011년 12월 현재 85개 나라에 힐튼 계열의 10개 브랜드 호텔이 3750개가 있다.

1868년 일본 막부정치의 종식, 메이지유신 시작

1868년 1월3일 일본이 왕정복고를 선포, 막부정치(幕府政治)가 완전히 종식됐다.

막부정치는 300여년 지속됐으며 이 기간 동안 정치와 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막부정권에 맞서는 세력이 성장하면서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계기로 막부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 크게 부각됐으며, 1866년 막부가 반대세력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존왕양이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왕정복고가 이루어졌는데, 같은 해 1월9일 메이지 천황이 등극한 것을 메이지 유신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막부(幕府)는 중국에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편 진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뜻에서 대장군의 진영, 나아가 무관의 임시 정청으로 그 의미가 파생됐다. 통상 전장에서 장군이 지휘소로 쓰던 천막을 가리키는 말이다.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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