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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가을 法語’ 장석주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 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 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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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길’ 박노해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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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감사하다’? ?정호승

    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프라타너스나 왕벚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쥐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드리고 고요했다 심지어 길가의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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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백로(白露) 홍사성

    태풍 몇 지나가자 겨드랑이 서늘하다 풀벌레 울음소리 창문타고 넘어오는데 흰 이슬 무슨 뜻 있어 맺혀있는 초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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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시마詩魔’ 이병기(1891~1968)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한 그의 모양을 찾아내기 어렵다 펴 든 책 도로 덮고 들은 붓 던져두고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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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나의 家族’ 김수영

    古色이 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新鮮한 氣運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 얼마나 長久한 歲月이 흘러갔던가 波濤처럼 옆으로 혹은 世代를 가리키는 地層의 斷面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ㅡ ?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家族의 입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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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코스모스를 노래함’ 오규원

    거리에서, 술집 뒷골목에서, 그리고 들판에서 가을은 우리를 역사 앞에 세운다. 거리에서 가을은 느닷없이 1906년 2월 1일, 일본이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일을 아느냐고 묻는다. 술집 뒷골목에서 조금씩 비틀거리는 내 앞을 가로막고 1960년 4월 25일에 대학 교수단 데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1960년 5월 29일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고, 1910년 6월 24일에는 구한국이 일본에 경찰권을 이양, 1885년 10월 8일에는 일본인이 민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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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산이 산에게’ 홍사성

    큰 산 작은 산이 어깨 걸고 살고 있다 작은 산은 큰 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큰 산은 너른 품으로 작은 산을 안고 꽃필 때면 큰 산이 작은 산에게 먼저 단풍들 때면 작은 산이 큰 산에게 먼저 애썼다 수고했다고 말없이 위로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천만년 그렇게 큰 산은 큰 산대로 작은 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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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백일홍 붉은 그늘’ 장옥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네 핏발 선 눈 그 사람 돌아왔네 빈 마을 온종일 쑤시고 다녔네 백일홍 고목만 더욱 붉었지 꽃상여 타는 강 위로 흘러가고 늙은 나무 꺼진 허파 기침 끝에 모였네 미친 바람 뒷간의 대숲을 흔들고 텃밭의 푸른 고추 열이 올랐네 시체가 산을 이룬 그 여름 장맛비에도 꽃꼭지마다 붉은 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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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구월이 오면’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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