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죽고 나 살기다. 전쟁이 이어지고, 관세가 장벽이 되고, 핵무기가 평화를 위협하는 지금의 정세가 그렇다. 그 중심에는 국민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결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흔드는지 돌아보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다.
트럼프, 네타냐후, 푸틴…. 이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각국의 정치적 사정도 다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를 희생시키느냐는 점이다.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는 미국 외교와 통상정책의 기준이다. 그가 관세를 올리면 다른 나라의 기업과 노동자, 소비자가 영향을 받는다. 이란과의 전쟁 역시 중동에만 머물지 않는다. 에너지 가격과 해상 운송, 세계 경제와 동맹국의 안보에 부담을 준다.
더 우려되는 것은 동맹을 거래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다. 동맹국에도 안보 협력에 따른 책임이 있다. 그러나 협력은 상대국의 사정과 판단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미국의 결정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거나 경제적 부담을 압박한다면, 오랜 신뢰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퓨리서치센터가 2026년 36개국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트럼프가 국제 문제에서 올바른 일을 할 것이라고 신뢰한다는 응답의 중앙값은 23%였다. 이 수치만으로 미국이 국제질서를 파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미국 대통령의 국제적 지도력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다는 점은 보여준다.
네타냐후에게는 전쟁과 민간인 보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한쪽의 범죄를 비판하면서 다른 쪽의 민간인 희생을 외면한다면 선택적 정의가 된다. 이스라엘 국민에게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듯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도 살아남을 권리가 있다.
네타냐후의 사법 문제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전쟁 지속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따져볼 사안이다. 다만 그 동기를 단정하지 않더라도 질문은 남는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민간인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지도자라면 그 결과에도 답해야 한다.
푸틴에게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이 있다.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가 용인되면 국제사회는 약육강식의 질서로 돌아간다. 강대국의 요구에 작은 나라가 굴복해야 한다면, 어느 나라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렵다.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은 전쟁의 위험을 한반도와 연결했다. 북한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고, 젊은 병사들이 타국의 전쟁에 투입됐다. 이들의 생명을 국가 간 거래나 전략적 이익의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를 가진 지도자의 위협은 더욱 무겁다. 핵전쟁이 모든 생명체를 없앤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규모 인명 피해와 장기적인 환경·사회적 파괴를 초래할 위험은 분명하다. 핵은 지도자의 힘을 과시하는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 그 위협 아래 놓이는 것은 상대국 정부뿐 아니라 수많은 시민의 삶이다.
시진핑을 푸틴과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만해협의 긴장과 미중 경쟁은 동아시아의 불안 요인이다. 중국이 강해지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커진 힘을 어떻게 행사하느냐가 문제다. 군사적 압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 한다면 주변국의 불신과 대응도 커진다.
김정은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핵무기를 체제 안전의 보루로 내세우고 청년들을 러시아의 전쟁에 투입하는 동안, 북한 주민의 삶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지도자의 전략적 계산과 주민의 생존이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 지도자들의 정치체제와 권력 기반은 서로 다르다. 선거로 권력을 얻은 사람과 권력을 세습한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체제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같다.
그렇다면 왜 세계는 이들의 행동을 막지 못하는가. 군사력과 경제적 의존, 국내 정치, 국가 간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화를 말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 민간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방과 적국의 희생에는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중국과의 교역을 필요로 한다. 유럽은 러시아를 제재하면서도 전쟁 이후의 안보질서를 고민해야 한다. 중동 국가들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자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나라들도 있다. 이런 계산이 책임을 묻는 일을 늦추거나 가로막는다.
시골 기자 한 명이 지도자 몇 명을 비판한다고 전쟁이 끝나고 관세 장벽이 낮아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기록하고 말해야 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정치, 전쟁을 협상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치, 갈등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에 침묵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계인이 한목소리를 내자는 말은 모든 나라가 같은 이해관계를 갖자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민간인 보호와 주권 존중, 전쟁에 대한 책임에서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우리 편의 지도자에게도 다른 편에 요구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에 세계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 의회와 사법부, 언론과 시민사회가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 국제사회도 대화를 약함으로 보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쟁을 시작하고 확대하는 결정에는 정치적·법적 책임이 따라야 한다. 명령은 짧지만 그 명령으로 생긴 상처는 세대를 넘어 남는다.
트럼프와 네타냐후, 푸틴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권력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죽음과 파괴, 불신과 갈등은 다음 세대가 감당한다. 그래서 우리가 판단할 것은 누가 가장 싫으냐가 아니라 어떤 권력 행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냐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비용으로 계산하는 지도력은 거부해야 한다. 평화는 지도자의 선의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들을 선택하고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행동, 그리고 그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달려 있다.
질문은 하나다. 다음 세대에 갈등을 물려줄 것인가, 평화를 물려줄 것인가.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에게 지금 그 답을 요구해야 한다. 그들이 내린 결정으로 누가 죽고, 누가 삶의 터전을 잃었는지 끝까지 물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