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국토·주권은 국가의 3요소다. 그런데 한 가지 요건이 더 필요하다. 헌법이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에게 나라는 없었다. 한민족이라는 주체와 한반도라는 영토는 있었지만, 나라의 주권은 없었다. 밖으로 나라의 주권을 선포하고 안으로 정부를 조직할 헌법이 없었다.
국민이 5·10 총선거로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제헌의회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그 헌법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민과 헌법이 정부보다 앞선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광야의 이스라엘에는 왕도 없고 영토도 없었다. 척박한 사막을 유랑하는 백성들만 있었다. 그때 신을 대리하는 모세의 십계명이 선포된다. 십계명은 종교의 규범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기본법이 되었다.
나라가 있기 전에, 왕을 세우기 전에 공동체의 기본법인 헌법이 먼저 제정된 것이다. 국민과 헌법이 국가보다 먼저요, 왕도 권력자도 모두 신이 수여한 법 아래에 있다는 의미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아니라 법치신수설(法治神授說)을 선포한 셈이다. 국민의 권익과 법의 규범을 신의 명령처럼 받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법치주의의 뿌리는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에 닿아 있다. 법치주의의 근간은 헌법이고, 헌법이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것은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 보장이다. 그렇지만 뼈아픈 반론이 제기된다.
“자유는 책임을 수반한다. 그 책임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통찰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자유를 어둑한 눈길로 바라본 사르트르의 탄식이다. 그 선고는 저주나 다름없다.
자유의 짐이 무겁고 책임의 결과가 두려운 나머지 다시금 전체주의적 억압의 굴레 속으로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일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의 심리적 경향을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낱낱이 폭로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자유를 버리고 다시 이집트의 억압 아래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유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모세의 십계명을 613가지의 세칙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문자 그대로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경직된 율법주의를 강조했다. 법치신수설과는 정반대인 법지상주의(法至上主義)다. 1세기 유대사회에서 현자(賢者)로 불리던 바리새파의 샴마이가 그 대표자였다.
반면에 율법을 유연하게 해석한 또 다른 현자 힐렐은 율법의 정신이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도 율법의 핵심을 ‘이웃사랑’으로 간명하게 요약했다. 법치의 바탕이 사랑, 곧 나눔과 섬김, 배려와 상생이라는 가르침이다.
사랑과 상생을 짓밟는 것이 분열이고 갈등이다. 분열과 갈등의 속살을 낱낱이 헤집어보면 한낱 포말(泡沫)처럼 부질없는 다툼에 불과할지 모른다.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릴 만큼 절체절명의 다툼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연대성을 잃어버리고 서로 대립·분열하면 외부세력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핵을 거머쥔 북한의 끝없는 무력 도발,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패권을 노리는 중국의 무력 증강에 나라의 운명이 또다시 휘둘리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다툼이 치열하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헌법 제104조 제2항)
대법원장의 제청권, 국회의 동의권, 대통령의 임명권은 서로를 제한한다. 대법원장의 제청은 대통령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추천하는 정치적 요식행위가 아니다.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국회가 동의 여부를 결정할 대상과 대통령이 임명 여부를 결정할 대상을 제한한다. 국회와 대통령은 제청된 사람에 대한 동의 및 임명 여부를 결정한다. 대법원장의 제청권도 법관추천회의가 결정한 범위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입법·사법·행정 3권(三權)의 절묘한 견제와 균형이다.
대법원장의 정무적 판단도, 대통령의 독선적 권력 행사도, 국회의 무절제한 입법권 남용도 모두 헌정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법치국가가 정치국가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3권은 왜 서로 싸우는가? 헌법정신을 외면한 정치적 계산, 정략적 술수 때문이다. 그 정략과 술수가 국가공동체의 연대성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고,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망친 뒤에 남이 망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해친 뒤에야 외적의 공격을 받게 된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맹자의 가르침이다(孟子/離婁篇). 지금 우리는 법치국가에 살고 있는가, 정치국가에 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