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로마에서 사형수를 처형하던 형벌에는 화형·참수형·십자가형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잔인한 형벌이 십자가형이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피를 많이 흘려 빨리 죽도록 하려는 것인데, 이때 휘두르는 채찍에는 동물의 뼈나 유리가 촘촘히 박혀 있어 세게 맞으면 살덩이가 쭉쭉 찢겨 나간다고 한다. 죽음의 고통을 단축해주려고 채찍질하는 역설적 자비(?)인 셈이다.
채찍질 뒤에는 사형수의 목과 양팔에 나무 십자가를 묶어 형장까지 스스로 메고 가도록 했다. 길가의 군중이 보게 하려는 공개 처형의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십자가의 무게는 가로 막대(patibulum)와 세로 막대(stipes)가 각각 40kg 내외로, 전체 중량이 80kg쯤 되었다고 한다.
예수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고난의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도중에 예수가 쓰러지자 로마 병사들은 키레네(리비아 동부 해안의 고대 로마 도시) 출신의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했는데, 그의 아들인 루포는 나중에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로마서 16:13). 아마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 후에 시몬의 가족 전체가 회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는 체중 때문에 몸이 아래로 처지면서 못 박힌 부위의 살이 찢어지고, 호흡곤란과 질식의 고통으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킨다. 또 혈액 손실로 갈증이 심해지고 고열(高熱)에 시달리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후에 사망한다고 한다. 사형수에게 동정받을 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경골을 부러뜨리거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요한복음 19:32, 34) 고통의 시간을 짧게 해주기도 하지만,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주연 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연기했다. 스파르타쿠스의 강인한 의지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을까.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눈과 귀와 생각마저도 말살시키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라고 저주했던 십자가형의 고통이 관객에게 절실히 와닿지는 못했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는 십자가형이 페르시아에서 맨 처음 시행되었다고 증언한다. 아마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주술적(呪術的) 상징물로 사용되던 십자가가 자연스럽게 사형 틀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했다(마가복음 8:34). 이것은 제자들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무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다. 종교 예식을 이끄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곧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제시된 요구다.
예배를 진행하는 성직자와 예배에 참여한 평신도 중 어느 한쪽이라도 십자가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거나 십자가의 무게를 삶의 어깨에 짊어지지 않는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 아닐까.
십자가의 무게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고통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는 희생의 수고일 것이다. 눈앞에 보여주는 십자가가 아니라 몸으로 짊어지는 십자가라면 피와 땀과 눈물이 없어서는 안 될 터이다. 교회당 정면에 걸린 십자가가 아니라 삶의 중력(重力)으로 온몸을 눌러오는 십자가,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 위에 서 있었던 처형대가 아니라 오늘 신앙인들의 삶의 자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십자가, 그것이 크리스천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일 것이다.

예수의 제자 안드레가 그리스의 파트라스에서 매달렸다는 X자형 십자가는 머리를 고정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 목과 어깨에 상상할 수 없는 긴장의 고통이 내리꽂힌다고 한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한다. 피가 온통 머리 쪽으로 쏠려 뇌혈관이 툭툭 터지는 극도의 고통 속에 죽어갔다는 전설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도들의 삶이요 죽음이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삶의 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늠름하게 활보하는 넓은 길이 아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오직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의지해 건너는(시편 23편)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의 길이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고난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겠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십자가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한 모습은 안타깝다기보다는 차라리 기이하게 느껴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