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과학칼럼

40년 전 첫 출근 ‘빅파마’에서 배운 것: 실패를 허용하는 문화가 한국 과학의 미래다

40년이 흘렀다. 오늘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한다. 과학은 천재의 영감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과학은 훈련된 사람만이 붙잡을 수 있는 우연으로 움직인다. 빅파마는 종종 탐욕의 상징처럼 비판받지만, 한 연구자의 발견을 약과 진단, 치료로 이어지게 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한국 과학이 더 멀리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논문이 아니라, 실패를 허용하는 훈련의 문화, 데이터를 정직하게 해석하는 태도, 그리고 발견이 사회로 이어지는 다리다. 젊은 연구자들이 40년을 걸어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토양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본문에서 <AI 제작 이미지>

40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이면서도, 성경에서는 ‘충분한 시간’ 혹은 ‘훈련을 통한 완성’을 뜻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숫자가 유난히 묘하게 다가온다. 40년 전 오늘,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첫 출근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6년 2월 2일 월요일, 나는 미국 뉴저지주 블룸필드(Bloomfield)에 있는 셰링-플라우(Schering-Plough) 연구소에 첫 출근을 했다. 흔히 ‘빅파마(Big Pharma)’라 불리는 제약산업 연구소의 세계로 들어간 첫날이었다. 이곳은 당시 미국 제약 연구의 중요한 현장이었고, 선배 과학자 이봉국 박사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추천으로 위스콘신 매디슨에서 박사과정과 포닥 과정을 마친 뒤 뉴저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77년 5월 말, 나는 아내와 함께 뉴저지를 떠나 위스콘신주 매디슨(Madison)으로 향했다. 지도교수 찰스 J. 시(Charles J. Sih)가 학기 시작 전부터 연구를 시작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셀프 이사는 시작부터 험난했다. 1967년형 크라이슬러 V8 차량에 이삿짐을 싣고 U-Haul 트레일러를 달아 이동했는데, 전진은 가능해도 후진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한 모텔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매디슨에서의 연구는 혹독했다. 토요일 휴무도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랩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1979년에는 석사 학위만 받고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때 시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Jim, you should continue to do Ph.D. works.” 당시 류코트리엔(leukotrienes) 연구 경쟁이 치열해졌고, 그 흐름은 결국 사무엘손(Bengt Samuelsson)의 노벨상(1982년)으로 이어졌다.

내 박사 연구는 “서서히 반응하는 아나필락시스 물질(Slow-Reacting Substances of Anaphylaxis)”의 구조 규명이었다. 매일 고양이 모델을 통해 물질을 농축하고 구조를 탐색했다. 끝내 류코트리엔 D와 E로 불리게 되는 물질의 구조를 규명할 수 있었고, 나는 198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포닥 시절의 경험도 결정적이었다. 방사성 표지된 [3H]아라키돈산(arachidonic acid) 실험에서 공급자를 바꾼 뒤 결과가 갑자기 사라졌고, 그 원인을 추적하다가 용매 차이(에탄올과 DMSO)를 발견했다. 그 작은 차이가 단서가 되어 포스파티딜에탄올(phosphatidylethanol, PEth)을 규명할 수 있었다. 오늘날 PEth는 지속적 음주 평가에 활용되는 지표로도 알려져 있다.

이런 경험을 품고 나는 셰링-플라우 연구소에 들어갔다. 첫 프로젝트는 학회 초록 실험을 재현하는 일이었는데, 결과는 같았지만 결론은 달라 보였다. 당시 ‘정답’처럼 여겨지던 포스포리파제 C(phospholipase C, PLC)보다 포스포리파제 D(phospholipase D, PLD)가 더 타당한 설명이라고 판단했다. “Seeing is believing.” 상사의 말대로 나는 다시 몇 달을 실험에 매달렸고, 동물세포 신호전달에서 PLD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증명할 수 있었다.

40년이 흘렀다. 오늘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한다. 과학은 천재의 영감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과학은 훈련된 사람만이 붙잡을 수 있는 우연으로 움직인다. 빅파마는 종종 탐욕의 상징처럼 비판받지만, 한 연구자의 발견을 약과 진단, 치료로 이어지게 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한국 과학이 더 멀리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논문이 아니라, 실패를 허용하는 훈련의 문화, 데이터를 정직하게 해석하는 태도, 그리고 발견이 사회로 이어지는 다리다. 젊은 연구자들이 40년을 걸어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토양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아래은 위 글에 나오는 용어해설입니다.

*류코트리엔(Leukotrienes)
알레르기, 천식,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몸속 신호물질이다. 기도를 좁히고 분비물을 늘려 숨쉬기 힘들게 만들 수 있다.

*SRS-A(서서히 반응하는 아나필락시스 물질)
알레르기 반응 때 천천히 나타나지만 오래 지속되는 물질이다. 천식 발작처럼 기도가 수축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아라키돈산(Arachidonic acid)
우리 몸 세포막에 있는 지방산이다. 염증·통증·면역 반응 물질(프로스타글란딘, 류코트리엔 등)의 원료가 된다.

*PEth(포스파티딜에탄올)
술을 마시면 몸에서 생성되는 특별한 지질(지방 성분)이다. 혈액검사로 최근 지속적 음주 여부를 비교적 정확히 판단하는 지표다.

*PLD(포스포리파제 D)
세포막의 지방을 잘라 신호물질을 만드는 효소다. 세포가 외부 자극을 받아 반응할 때 중요한 “신호전달 스위치” 역할을 한다.

배진건

배진 바이오사이언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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