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꽃과 바람과 침묵 속에 남은 이름, ‘오우덴 중령’과 ‘오렌지 튤립’

횡성 네덜란드참전기념탑과 오우덴 중령
[아시아엔=황건 이화여대 초빙교수] 몇 년 전, 네덜란드의 크켄호프(Keukenhof) 식물원에서 오렌지색 튤립을 보았다. 그때는 그저 왕가의 색, 봄의 축제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렌지 튤립을 보면 한국 땅에서 피 흘린 네덜란드 병사 768명이 먼저 떠오른다. 꽃의 색이 기억의 색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는 1월 18일 횡성에 위치한 네덜란드참전기념탑 앞에 섰다. 하늘을 찌를 듯 선 풍차 모양의 탑, 그 아래 묵묵히 서 있는 병사의 석상, 네덜란드 국기의 삼색이 차갑게 박혀 있다. 이곳에서 전사한 덴 오우덴(L.C. Marinus Petrus Antonius den Ouden) 중령의 이름을 떠올린다. 철수가 결정된 상황에서도 무너져 가는 횡성교 위에서, 자기 부대가 아닌 철수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엄호하다 전사한 사람. 명령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택. 그는 연합군 장교이기 전에, 눈앞의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고, 횡성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이 땅에 ‘기억’으로 남았다. 바람에 돌아갈 것 같은 풍차의 날개를 보며, 나는 크켄호프의 튤립을 다시 떠올린다. 네덜란드의 봄과 한국의 겨울 전쟁터가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그리고 나는 풍수원성당으로 향했다. 미사를 놓쳐 불 꺼진 성당에 혼자 들어가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채 앉았다. 중앙 제대 한가운데 모셔진 감실, 그 위에 소박한 나무 십자가. 성체의 등불은 벽이 아니라 허공에 매달려 있다. 땅에 고정되지 않은 빛. 전쟁 한복판에서 떠다니는 희망처럼 느껴졌다.

문득 한 미군 병사의 기도가 떠올랐다. “하느님, 제발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해 주세요.” 교리도, 수사도 없는 완전히 인간적인 언어. 살고 싶다는 외침. 그 기도는 응답되었고, 그는 무사히 돌아가 감사의 표시로 성모상을 보내왔다고 한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그 성모상은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나는 같은 날, 기념탑과 감실 앞에 섰다. 한쪽에는 죽음을 끝까지 막아낸 사람들의 이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죽음을 앞두고 살아남기를 구한 사람의 흔적이 있다. 방식은 달라도, 둘 다 인간이 끝까지 인간이었던 자리다.

오렌지 튤립을 볼 때마다, 나는 왕가보다 먼저 횡성의 다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바람에 도는 풍차 날개를 볼 때마다, 그 위를 건너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생각할 것이다. 기억은 이렇게, 꽃과 바람과 침묵 속에서 살아남는다.

이날의 순례는, 나에게 그 사실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네덜란드 6.25 참전비문

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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