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으로 ‘천국 촬영소’로 떠난 배우 안성기

안성기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에서 아역으로 데뷔했으며, 거지(‘고래사냥’)부터 대통령(‘피아노 치는 대통령’, ‘한반도’)까지 모든 역할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력으로 2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절제되고 반듯한 인품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국민배우’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7년 그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을 ‘한국영화의 페르소나(Persona), 안성기전’으로 명명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 한국 영화사가 그대로 담겼다는 의미였다.
임권택 감독은 “안성기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이 생겨났을 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그는 국내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했다. 오랜 기간 정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성실하고 절제된 자세로 흔한 스캔들조차 한 번도 없었으며, 신의와 예의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다.
필자가 UNICEF(국제연합아동기금) 기획관리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소설가 박완서와 배우 안성기는 1980년대부터 UNICEF 친선대사(Goodwill Ambassador)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해외 유니세프 구호 현장을 찾아 어린이들의 손을 맞잡고 희망을 전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고인은 “어린이를 마주할 때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배운다”고 말하곤 했다.
고인은 2019년 혈액암의 한 종류인 림프종 진단을 받고 치료를 거쳐 2020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추적 관찰 중 암이 6개월 만에 재발해 지속적인 항암 치료를 이어왔다. 지난해 12월 30일 자택에서 식사 중 음식물이 목에 걸려 쓰러졌고, 심정지 상태로 순천향대학교병원으로 이송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 입원 엿새 만인 1월 5일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많은 인사들이 고인을 추모했다.
정부는 대중문화예술 분야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영화사와 문화예술 전반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안성기 선생님의 별세를 깊이 애도한다”며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았던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정순택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도 “안성기 배우께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평화가 내리길 빈다”고 추모했다.
혈액암(hematologic malignancy, 국제질병분류 ICD-10)은 혈액이나 림프계에 발생하는 암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백혈병, 림프종, 다발성 골수종이 있다. 발병률은 다른 암에 비해 낮지만, 림프종을 제외한 혈액암은 일반 고형암보다 생존율이 낮은 편이다. 혈액과 림프는 전신에 퍼져 있어 특정 종양 부위가 없으므로 수술적 치료는 어렵다. 대신 항암제 치료, 방사선 치료, 골수이식 등이 시행된다.
혈액암은 조용히 시작되는 ‘침묵의 암’이지만 우리 몸은 신호를 보낸다. 초기 증상으로는 △원인 없는 체중 감소 △충분히 쉬어도 회복되지 않는 전신 피로 △2주 이상 지속되는 미열과 야간 발한 △잦은 감염이나 잘 낫지 않는 염증 △코피·잇몸 출혈, 쉽게 생기는 멍 △목·겨드랑이·사타구니 림프절 비대 △허리·갈비뼈·척추 통증 등이 있으며, 이러한 증상이 지속될 경우 주의가 필요하다. 혈액암은 조기 발견이 생존율을 좌우한다.
안성기가 앓았던 림프종(Lymphoma)은 최근 10년 사이 환자가 약 55% 증가했다. 2015년 약 2만6600명에서 2024년에는 약 4만4000명으로 늘었다. 이는 인구 고령화와 환경 오염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림프 조직은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뿐 아니라 복강 등 전신에 분포해 있어 림프종은 신체 어느 부위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림프계는 림프관과 림프절로 구성되며, 림프관에는 림프구를 포함한 혈청과 유사한 무색의 림프액이 흐른다. 림프절은 림프관을 따라 다양한 크기로 전신에 분포해 있으며, 이로 인해 림프종은 신체 어느 부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림프종은 면역 체계를 담당하는 림프구가 암세포로 변해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으로, 백혈병·다발성 골수종과 함께 3대 혈액암으로 분류된다. 림프구(lymphocyte)는 림프계, 혈액, 골수에 존재하며 B세포와 T세포로 나뉘어 세균과 바이러스 감염에 맞서는 역할을 한다. 림프종 암세포는 휴지기 없이 계속 증식하는 특징을 보인다.
림프종은 크게 호지킨 림프종(Hodgkin lymphoma)과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구분된다. 예후는 양성 종양에 가까운 경우부터 극히 불량한 경우까지 매우 다양하며, 세포 크기 또한 소세포에서 대세포까지 폭넓어 분류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호지킨 림프종이 여성보다 남성에서 약 2.2배 더 많이 발생한다. 이 질환은 1832년 영국 의사 토마스 호지킨(Thomas Hodgkin, 1798~1866)이 처음 보고했다.
초기 증상은 단순 피로나 감기 몸살과 비슷해 조기 발견이 쉽지 않다. 가장 흔한 증상은 목·겨드랑이·사타구니 등에서 만져지는 멍울로, 초기에는 통증이 거의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다. 병이 진행되면 원인 불명의 발열, 식은땀, 체중 감소 등 전신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림프절 침범 시 가장 흔한 증상은 림프절 비대이며, 통증이 없고 만졌을 때 자유롭게 움직이며 피부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통증과 피부 변화가 동반되면 호지킨 림프종의 빠른 진행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종격(縱隔, mediastinum) 림프절을 침범할 경우 흉통, 기침, 호흡곤란 등의 호흡기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혈액암 예방을 위해서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신선한 재료로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운동은 일주일에 3~4회, 한 번에 30분 이상 꾸준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녹황색 채소와 과일을 충분히 섭취하고, 가공식품과 붉은 육류 섭취를 줄이는 것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