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 <한·일 관계 80년사: 강창일 전 주일대사가 본 한·일 관계의 통찰과 해법>은 해방 이후 80년간 굴곡을 거듭해온 한·일 관계를 단순한 외교 연대기가 아니라, 정권·국제정세·역사 인식이 어떻게 맞물려 작동해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망한 교양 역사서다. 저자 강창일은 역사학자이자 4선 국회의원, 그리고 주일대사를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한·일 관계를 둘러싼 감정과 이념, 실익과 원칙을 차분히 분해해 보여준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저자가 정권의 유불리에 따라 출렁여온 한·일 관계의 구조 자체를 문제 삼는 지점이다. 그는 한·일 관계가 ‘친일 대 반일’, ‘굴욕 대 자존’이라는 이분법에 갇힐수록, 양국 모두 장기적 이익과 안정적 협력을 놓쳐왔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는 핵심이 바로 “국가와 사람을 분리해서 보고, 감정적 반일을 넘어 이성적인 지일(知日)을 추구하자”는 제언이다. 일본 정부의 정책과 일본 사회·시민을 동일시하지 말고, 냉정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일본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자주 외교의 출발점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제안은 역사 문제와 경제·안보 협력을 분리해서 보자는 인식이다. 저자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이라는 역사적 과오를 결코 희석하거나 덮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동시에, 과거사 문제를 이유로 현재와 미래의 경제·안보 협력까지 일괄적으로 봉쇄하는 접근 역시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역사에는 원칙을 세우되, 기후 위기, 공급망 재편, 동북아 안보 환경처럼 공동 대응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실질적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타협이 아니라, 분리와 병행이라는 성숙한 외교 전략에 가깝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올해가 갖는 시간적 의미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해방 80년, 한·일 수교 60년을 갓 넘긴 시점에서 우리는 이제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넘어 ‘미래를 어떤 관계로 설계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저자는 해방 100년, 수교 100년을 살아가게 될 지금의 10대와 MZ세대에게, 감정적 대립과 정권 따라 흔들리는 한·일 관계가 아니라, 원칙은 분명하되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웃 관계를 물려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노만 남는 기억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협상할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일 관계 80년사>는 일본을 두둔하는 책도, 일본을 단죄하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을 ‘제대로 아는 것’이 왜 한국 사회의 미래 역량과 직결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한·일 관계를 감정의 문제가 아닌 세대의 문제,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려는 독자라면, 이 책은 해방 100년을 준비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