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기만의 시선] 85살에 머물고 싶은 노 교수, “인생의 10월, 흐르는 강물처럼…”

로젠브라트처럼 늙어가고 싶은 게 우리 70대의 소망일 것이다. 굳이 70대 이후 대업을 이룬 자이언트(Giant)들이 되지 않아도 좋다. 흐르는 강물처럼,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듯이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요즘 꽤 많은 글을 쓰는 편인 필자는 “앞으로 10년은 이 상태로 더 글을 쓸 수 있는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갈구(渴求)한다. 70, 80대 이상이면서 뭔가 성취를 위해 용맹정진 하고 있는 분들께도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먼 외국에 있지만 85살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로젠브라트에게도 (영원히는 불가능하지만) 그 꿈이 삶을 활기차게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기를 기원한다. 거듭 말하지만 ‘태도(Attitude)’가 당신을 결정한다.-본문에서 <AI가 생성한 이미지>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이 마음에 와닿았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즈(NYT) 10월 26일자 독자란에 투고된 에세이로 ‘영원히 85살로 머물고 싶다’(I’d like to stay 85 forever)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을 쓴 로저 로젠브라트는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고 은퇴했다. 길지만 글을 요약해 본다.

<지금 나는 80대의 나이에 이르렀고, 이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 노력할 것이다. 나는 지금 이곳이 즐겁다. 이 시기는 ‘노년기의 10월’과 같다. 그리고 10월은 참 아름다운 달이지 않은가? 물론 좌절의 순간도 있다. 이를테면 며칠 전,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을 때처럼 말이다. 거실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의자가 내 밑에서 미끄러져 나가 버렸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피아노 건반에 부딪혔다. 두번이나 수술했던 허리는 너무 약했고, 근육이라곤 없는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아내 지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비극이라기보다 어리석다는 느낌이 더 컸다. 그 넘어짐은 80대가 지닌 한계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이 나이가 지닌 약점들은 동시에 이 시기가 선사하는 선물들에 의해 충분히 보상된다. 요즘 나는 자유로운 시간이 아주 많다. 그리고 그 시간을 나름대로 독특하지만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채우고 있다. 나는 시를 많이 낭송한다. 때로는 아내 지니에게, 더 자주 창문을 향해. 그것은 내가 20대 시절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던 때부터 머릿속에 겨울잠처럼 잠들어 있던 시들이다. 그 시절 나는 많은 시를 외웠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소네트, 딜런 토머스의 빌라넬 한 편, 마리앤 무어의 ‘The Mind is an Enchanting Thing’, 매튜 아놀드의 ‘Dover Beach’의 마지막 구절들, 그리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Lines Composed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의 서두 연 전체를 읊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단지 기억력이 좋다는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의 지속적인 힘을 보여주는 예로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조금은 자랑도 하고 싶다.

요즘 나는 그 때 머리를 부딪쳤던 피아노를 더 자주 연주한다. 어려서 악보 읽기를 배우는 게 귀찮아서 항상 귀로만 연주했기 때문에, 예전엔 연주 폭이 아주 좁았고, 특히 코드에 취약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아지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다. 물론 내가 빌 에번스나 노래 부르기 전의 냇 킹 콜처럼 들릴 일은 없겠지만, 터치는 제법 괜찮고, ‘My Romance’, ‘My Funny Valentine’, ‘What’ll I Do’ 그리고 거슈윈 형제, 팻츠 월러, 콜 포터의 곡 대부분은 그럭저럭 소화할 수 있다. 내 나이에 무엇이든 좀 더 잘하게 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제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들(달리기, 농구, 테니스)이나 사소한 일로 죽을 만큼 걱정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의 10월이 오기 전에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밤이면 고질라처럼 커다랗고 무서운 문제로 불어날 때까지 끊임없이 곱씹었다. 내 불안한 마음에는 작은 거절도, 아주 사소한 무시도 결코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나는 “아무도 당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 자기 생각에 바쁩니다. 당신처럼”이라는 규칙을 만들어 적어두기도 했지만, 믿지는 못했다. 이제는 누가 나를 생각하든 말든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정말로.

이 10년 동안 자연에 대한 내 사랑은 훨씬 더 깊어졌다. 예전에도 자연과의 친밀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저 막연하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요즘 나는 창가에 서서 경이로운 눈길로 이스트강(정확히는 하구)을 바라본다. 푸른 회색 물 위에 드러나는 형상들, 물결의 자국과 소용돌이, 밀물과 썰물, 몰려드는 파도의 군대, 그리고 물에 비친 구름이 마치 물속에 잠긴 양떼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는 무엇을 하느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10월이 되면 공기가 바뀌듯, 나 역시 예전보다 훨씬 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내 자신을 친구와 가족에게 훨씬 더 많이 내어주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여섯의 특별한 손주를 기르는데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 같다. 10월의 나이 이전에는 매일 그들 각자에게 똑같이 가볍게 “사랑해”라는 쪽지를 썼다. 이제는 그들의 삶에 틈틈이 끼어들어 이것저것 묻고, 개인적인 농담을 주고받을 시간과 자유가 생겼다. 아이들은 내 관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마음껏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번성한 정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다.

전반적인 개선은 이렇다: 젊었을 때는 항상 앞으로 닥칠 일을 걱정하며 살았다. 이제는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80대가 되어보니, 내가 가진 것이 상당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다. 꿈, 내 나라와 세계를 위한 꿈. 그리고 사랑이 온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아내 지니, 의자와 이별할 때 내 발을 일으켜 세워준 놀라운 늙은 아내 지니에 대한 내 시각은 10월이 와도 변하지 않았다. 62년 전 우리가 결혼했을 때처럼 지금도 그녀를 구원자처럼 본다. 선명한 색깔, 시원한 바람, 완벽한 날씨. 85살에 머물고 싶다.>

물론 물리적으로 85세에 머무는 건 불가능하다. 그 나이에 머물고 싶다는 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러나 희망은 ‘깨어난 사람의 꿈'(아리스토텔레스)이며 ‘가난한 사람의 빵'(탈레스)이다. 글을 쓴 로젠브라트는 85살에서 느끼는 안정감, 평온을 말하고 있다. 격렬한 운동(테니스)은 할 수 없지만 시를 낭송하고 어렵지 않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6명의 손주들과 노닐고 자연을 관조하는 재미를 담담하게 말한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85살에 내내 머물고 싶다는 것이다. 그보다 13살이나 적은 필자의 친구는 평평한 길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다치고 1년 이상 고생했다. 또 다른 친구도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지면서 코뼈와 턱뼈가 나가 대수술을 했다. 로젠브라트 도 넘어졌을 때의 절망감을 술회한 바 있다. 노인은 넘어지면 절대 안된다.

필자도 최근 손주 셋에게 주술처럼 빠져들고 있다. 혹자는 “할배 지갑은 손주 앞에서는 무장해제 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주는 게, 쓰는 게 즐거운데 어쩌겠나. 로젠브라트처럼 늙어가고 싶은 게 우리 70대의 소망일 것이다. 굳이 70대 이후 대업을 이룬 자이언트(Giant)들이 되지 않아도 좋다. 흐르는 강물처럼,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듯이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요즘 꽤 많은 글을 쓰는 편인 필자는 “앞으로 10년은 이 상태로 더 글을 쓸 수 있는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갈구(渴求)한다.

70, 80대 이상이면서 뭔가 성취를 위해 용맹정진 하고 있는 분들께도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먼 외국에 있지만 85살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로젠브라트에게도 (영원히는 불가능하지만) 그 꿈이 삶을 활기차게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기를 기원한다. 거듭 말하지만 ‘태도(Attitude)’가 당신을 결정한다.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역임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자동 게재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