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산업사회

정운찬 전 총리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사태, 주권 의미 묻는 분수령..한미동맹 의존 아닌 대등한 목소리 내야”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 한국정치학회 ‘기로에 선 한미관계’ 학술회의 기조발제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20일 “미국은 여전히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지만, 그 동맹이 건강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의존과 침묵이 아니라 대등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총리는 이날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과 한국정치학회가 개최한 ‘기로에 선 한미관계: 미국일방주의 시대, 한미관계의 미래를 묻는다’ 공동 학술회의 기조 발제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정 전 총리는 “단호히 항의하고 반드시 정당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공식적으로 받아내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투자 재검토와 같은 실질적 조치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사회의 내부 갈등을 전략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며 이재명 정부에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야당과의 협치를 통해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지난달 미국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발생한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대규모 한국인 구금 사태가 “우리에게 국격과 주권의 의미를 다시 묻는 역사적 분수령이 됐다”고 짚었다.

ICE가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동맹국 노동자를 ‘범죄자’처럼 연행한 이 사건은 “단순한 법의 집행이 아니라 미국우선주의라는 정치적 기조가 동맹의 신뢰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표출된 사례”라며 “결국 동맹의 이름으로 추진된 투자가 오히려 주도권의 불균형을 드러낸 사건이 됐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정운찬 전 총리 발제문 전문


존경하는 한국정치학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최근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에서 벌어진 사태를 계기로 더욱 절실히 던져야 할 물음입니다.

1. 한미동맹의 역사와 양면성
우리는 흔히 한미동맹을 “피로 맺어진 관계”라고 부릅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었고, 그 후 많은 경제 원조를 제공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토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저 역시 유학 시절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하고, 콜럼비아대에서 교편을 잡으며 미국 사회의 역동성과 학문적 자유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냉전 시절 자주 회자되던 경구가 있습니다. “소련 사람은 속지 마라, 미국 사람은 믿지 마라, 일본 사람 일어난다.” 단순한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꿰뚫은 외교적 교훈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조공 질서, 일본의 식민 지배, 소련의 군사적 위협, 그리고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의 전략적 계산 속에서 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려 왔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믿음’만으로는 동맹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줍니다.

2. 조지아 사태와 동맹의 민낯
이번 조지아주 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동맹국의 노동자를 범죄자처럼 연행한 것은 단순한 법 집행이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정치적 기조가 동맹의 신뢰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대규모 투자를 환영하면서도, 그 투자를 뒷받침할 합법적 비자 제도를 터무니없이 좁혀 두었습니다. 기업들은 불가피하게 단기 비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구조적 모순이 이번과 같은 참담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국의 제도적 모순과 국내 정치가 결국 동맹국 국민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3.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
이번 사태가 던지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첫째, 단순한 외교적 항의로는 부족합니다. 정당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반드시 받아내야 합니다. 둘째, 필요하다면 투자 재검토와 같은 실질적 조치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번 사태가 없었더라도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라는 요구는 무리입니다. 셋째, 우리 기업 또한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관행을 버리고 철저한 컴플라이언스 경영 문화를 확립해야 합니다.

4. 협치와 국익
이 과정에서 정치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야당과 협치를 통해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외교와 안보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사회의 내적 갈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쟁에만 몰두한다면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 될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위원장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했음에도 실질적 진전이 없었던 이유 역시 남쪽 내부의 합의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야당의 동의 없이 진행된 정책은 정권 교체와 함께 백지화되었습니다. 김정은도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국익은 내부의 합의에서 비롯되며, 협상력 또한 국내적 정당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5. 학계와 정치권의 과제
정치권은 이제 미국 의존만을 강조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맹은 보호막이 아니라 철저히 국익에 기초한 협력 구조입니다. 주권국가의 존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강대국과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전략적 자세를 확립해야 합니다. 학계 또한 정치학과 경제학의 지혜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동맹은 균형 속에서만 작동하며, 힘의 논리를 넘어서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케인즈가 1919년 출간한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주는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케인즈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이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배상금을 부과한 베르사유 조약이 결국 유럽 전체의 경제 붕괴와 더 큰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것처럼, 일방적인 우위 추구와 징벌적 조치는 장기적으로 파국을 낳을 뿐이라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이는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기조가 동맹의 신뢰를 훼손하고 있는 지금, 동등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서로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는’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역사적 근거가 됩니다. 진정한 동맹의 미래는 바로 이러한 균형과 상호 존중에 달려 있습니다.

6. 주권과 존엄의 과제
결국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국격”과 “주권”의 의미를 다시 묻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입니다. 그러나 그 동맹이 진정으로 건강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의존과 침묵이 아니라, 대등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주권국가로서 우리의 존엄과 국익을 지키는 일,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큰 자부심이자 소중한 유산입니다.

저는 오늘 이 학회가 한국 정치와 학문이 그 길을 함께 열어가는 데 중요한 지혜를 보태주리라 믿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국

The AsiaN 편집국입니다.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자동 게재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