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가능성이 없다?

인간에게 ‘가능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언제나 가능성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가능성을 따지고 계산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가능성 있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고,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있어야 투자하며, 사람을 뽑을 때에도 그의 가능성을 평가합니다. 인간은 가능성을 가지고 자신과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절망이란 무엇일까요? 가능성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 삶의 의욕도 의미도 증발해 버립니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는 고통의 뿌리에도 ‘가능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좌절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깊은 절망입니까? 인생에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타인에게서 그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을 때에는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손절하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는 꺾는 것이 맞고, 다시 타오를 기미조차 없는 등불은 차라리 빨리 꺼뜨리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그 가능성의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이 정의에 당혹감을 느끼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꺾여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작고 미미한 등불이 누군가의 입김 한 번에 꺼져 버렸던 아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가능성 여부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에 근거합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에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에게는 절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가능성의 극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인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zero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불태우셨습니다.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목자의 선택을 세상의 어떤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 3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