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이우근 칼럼] 미리엘 신부와 장발장, 그리고 새 교황 레오 14세

미리엘 신부와 장발장, 그리고 경관

<레 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는 생면부지의 전과자 장발장을 ‘이름도 묻지 않고’ 사제관 안으로 받아들인다. 장발장은 사제관의 은그릇을 훔치지만, 신부는 경찰관에게 “은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그에게 주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법정에서라면 위증죄요, 범죄자를 숨긴 범인은닉죄다. 성당 소유물인 은그릇과 은촛대를 마치 자기 물건인 것처럼 장발장에게 내어준 것도 업무상횡령죄에 해당한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성직자의 입으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범죄자를 숨겨준 미리엘 신부는 법의 정의를 어기고 낯선 절도범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열린 사랑이다. 그 열린 사랑이 장발장을 새로운 삶으로 이끈다. 법과 정의의 수호자 자베르 경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고통과 불행 속에서 신음하는 숱한 이웃들을 외면한 채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저 세상에서도 잘 살아야겠다”는 지독한 이기심으로 헌금을 바치고 신앙고백을 읊조려 슬쩍 얻어내는 ‘나 홀로 구원’을 소망한다면,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 질책이 기다리고 있다. “혼자서는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Solus Christianus, Nullus Christianus.)

아브라함은 복을 누리는 ‘복의 바다’가 아니었다. 남에게 복을 끼치는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았다(창세기 12:2). 바다는 풍요롭고, 근원은 옹색하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낯익은 혈통의 울타리를 벗어나, 낯선 이방인들의 낯선 땅으로 나아갔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1) 예수의 이 말씀은 복수형, 현재 시제다. 천국은 혼자 가는 곳이 아니다. 너희, 그 공동체의 자리다. 또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미래의 어떤 공간이 아니다. 작은 겨자씨처럼,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처럼, 밭에 감춰진 보물처럼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already, not yet) 영원의 자리다.​ 지금 여기, 우리 안에(hic et nunc, intra nos) 이미 와 있는 영원한 현재…초월의 현현(顯現, epiphany), 영원의 성육신(成肉身)이다.

영원은 현재에 머무를 수 없고, 현재는 영원을 담을 수 없다. ‘영원한 현재’는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o)이다. 그 모순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요한계시록 21:6)인 초월 안에서 해소된다. 초월은 영원과 현재가 만나는 신비다. 기도는 바로 그 신비, 그 초월 아닌가. 기도는 영원을 품은 초월의 언어이기에.​

길거리에서 받은 전도지에 이렇게 씌어있었다. “주 예수를 믿어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사도행전 16 :31). 구원의 길이 이처럼 단순했던가? 단 두 문장이지만, 담긴 뜻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믿음이 개인의 구원으로, 개인의 구원이 그 집의 구원으로 이어진다. 여기의 집은 내 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태복음 12:48~50)

믿음과 구원은 개인 실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웃과 공동체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그래서 사랑이다.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씨앗 하나의 희생이 많은 열매와 그보다 더 많은 씨앗을 맺는 것처럼… 그 희생은 가족애‧동포애‧민족애처럼 ‘확장된 자기애’에 멈추는 ‘닫힌 사랑’이 아니다. 혈연‧지연‧국경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활짝 ‘열린 사랑’이다. 그 열린 사랑이 낯선 이웃들을 서로 이어준다.​

이처럼 열린 사랑을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절대적 환대(歡待, hospitality)의 윤리’라고 부른다. 관용은 타자(他者)를 내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비교우위(比較優位)의 너그러움’이지만, 환대는 내 울타리를 허물어 나와 타자의 구별 자체를 없애는 동등한 자리의 사랑이다. 장발장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직의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 범죄자의 자리에로 내려간 미리엘 신부처럼… 신부는 장발장을 ‘동정’해서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의 자리에 스스로 ‘참여’한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지만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은 천사에 가깝다.”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의 깨달음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낯선 이웃 한 사람이 나를 사랑받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자리로 이끄는 길잡이가 아닐까? 혼자서는 영원에 이를 수 없기에.

이우근

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