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스승의날 단상…최우권 선생님, 그 짧고 날카로운 가르침

1986년 1월 그 추운 겨울날 만난 그때 그 최우권 선생님
스승의날 사흘이 지났다. 하루이틀 찰나를 지나고 나면, 늘 그렇듯 일상으로 돌아가고, 감사의 마음도 묻히곤 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 못하는 분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나에게는 최우권 선생님이 그런 분이다. 1986년 1월과 2월, 종로3가 시사영어사 직영 현대학원에서 아침 7시 수업으로 만난 그분은 ‘타임 강독반’과 ‘워드 파워’ 수업을 통해 내 영어의 토대를 바꿔 주셨다. 내 영어 실력이 70쯤이라면, 그 중 6~7할은 선생님 덕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당시 강의는 짧고 날카로웠다. 주 5일 매일 아침 50분간, 꼭 필요한 이야기만 콕콕 집어 전달해주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뿐 아니다. 시국이 시국이던 당시 그분의 ‘시사 촌철’은 이후 내 기자 생활에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불모지였던 남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 준비를 하던 내게 최 선생님의 두 과목 강의는 천재일우였다. 무엇보다 그의 영어 <워드 파워> 강의는 어원(Etymology)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즉 단어의 기원(origin)과 역사(history), 그리고 그 단어의 형태와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주목하라고 일러줬다. 이후 어원을 파고 드는 것이 언어 공부의 왕도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공부 방식은 사회현상 이해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말하자면 본질과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두 과목 수강 덕분에 나는 유학에 필요했던 토플과 GRE에서 꽤 좋은 점수를 받았고, ‘뜻밖에’ 치른 한겨레 입사시험 영어에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한겨레 합격 뒤 선생님께 감사 전화를 드렸더니, “유학 가는 거보다 백배 잘했다”며 거나한 저녁을 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역시 1977년께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유학 직전 당시 중동붐으로 한-이스라엘 단교로 포기해야 했다. 만일 선생님이 예정대로 유학을 갔더라면 나와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1988년 2월 영어 학원 수강 2년만에 다시 인연을 잇게 되었고, 가끔 전화로 안부를 여쭙곤 했다. 하지만 바쁘단 핑계로 전화 통화가 전부였다. 스승의날 무렵이 되면 생각은 늘 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7-8년 전 그분을 꼭 뵙고 싶단 생각이 나도 모르게 일어났다. 하지만 선생님의 서울대 언어학과 동창들, 근무하시던 학원에 전화해도 아는 분이 없었다. 영자신문에 있던 한 선배로부터 그가 지은 책 제목을 확인한 정도였다. 나는 페이스북에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얼마 뒤 유재원 외대 명예교수님이 답을 주었다. “그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서울대 언어학과 후배인 유 교수님은 자세하게 최 선생님에 대해 얘기해 줬다. “2003년 어느 겨울, 송년 모임을 마친 뒤 추위 속에 홀연히 골목을 걸어 사라지시던 뒷모습이 그분과 마지막이었어요. 나도 한참 후 그분이 2013년께 별세하셨던 소식을 들었어요.”

유재원 교수님에 따르면 최우권 선생님은 전적으로 ‘토종 영어’셨다고 한다. 1974년께 대한항공 입사시험에서 불어, 독일어, 영어 모두 1등의 전설을 남기고 이스라엘 유학이 막힌 후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시작했다. 성경을 히브리어, 네덜란드어, 라틴어 등 7-8개 언어로 술술 읽으며 언어와 신학, 문학을 넘나들던 학문적 로맨티스트였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자신에 충실한 독불장군이지만 깊은 내면을 지닌 분이었다고 한다..
나는 종종 내게 묻는다. 1986년 겨울, 그 두 달이 내 삶에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짧지만 강렬했던 그 시절, 나는 추운 겨울 새벽을 뚫고 종로의 현대학원으로 향했고, 그 안에서 최우권 선생님을 만나 영어를 넘어 세상을 보는 눈을 배웠다.
얼마 전, 오래된 수첩에서 선생님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02)798-0486(댁), (02)738-5151(직장). 연결되지 않았다. 그 번호는 나에게 선생님과의 인연이 ‘실재했음’을 말해주는 마지막 단서였다.
살아가며 진심으로 고개 숙이게 되는 스승을 꽤 많이 만난 편이다. 나는 그분들을 내게 주신 그분께 늘 감사드린다.
최우권 선생님께 전하고 싶은 말로 글을 맺는다.
진실로 고마우신 최우권 선생님, 저는 요즘 만나는 대학생들에게 ‘워드 파워’를 선물하곤 합니다. 그때는 노먼 루이스의 이 책을 원어로 배웠는데, 지금은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로 아주 쉽고 깔끔하게 나와 있습니다. 부록으로 영어판 원서와 함께요. 그들에게 제 작은 선물이 선생님께 받은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최우권 선생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