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진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휴대전화 속에서 안부를 주고받던 분이다. 지난해 생신을 축하드렸을 때 스님은 “나이 들어보니 건강이 최고의 행복이더군요”라고 답하셨다. 새해 첫날에는 “이상기 거사님의 새해는 정의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는 을사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했다.
그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명진 스님과 나의 인연은 꼭 20여 년 전 평양에서 시작됐다.
2005년 평양에서 처음 만나다
2005년 6월,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했다. 나는 당시 한국기자협회 회장이었다. 명진 스님도 남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왔다.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남과 북에서 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평양 양각도호텔의 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남북관계에 아직 상당한 기대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만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평양에서 돌아온 뒤 그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만든 모임이 ‘말목회’였다. 명진 스님을 중심으로 김근식 교수, 박석무 선생, 박원철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상임대표, 배기선 의원, 서동만 교수, 송태호 경기문화재단 대표, 정기열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국제위원장, 조성우 민화협 상임의장, 김종수 홍창진 신부 등 정치·학계·종교·언론·시민사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함께했다. 나는 모임을 소집하는 일을 맡았고, 안영민 <민족21> 대표가 연락을 도왔다.
성향도 직업도 달랐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만큼은 공유하고 있었다. 6·15 5주년 평양에서 직접 보았던 남과 북,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가능성을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냥 흘려보내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목회’는 단순한 친목모임과는 조금 달랐다. 거창한 조직도 아니었고, 무슨 선언을 내놓는 단체도 아니었다.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남북문제를 이야기하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평양에서 품었던 생각을 이어가던 작은 민간 네트워크였다.
당시 내 기록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다. “6·15 5주년 평양의 밤을 기억하며 명진 스님을 모시고 결성한 말목회를 기억하시죠?” 지금 그 문장을 읽으면 당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명진 스님은 그 모임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이자 월간 <민족21> 발행인이었던 스님에게 남북 화해와 교류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게 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듣게 하고, 관계를 끊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더이상 모임은 하지 않지만 말목회의 가장 큰 의미도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말보다 먼저 사람을 보던 스님
명진 스님을 떠올리면 정치적 발언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스님에게는 다른 면이 많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정치적 잠행과 새로운 행보를 이어가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손 전 지사가 한 사찰을 찾았는데, 취재진을 피하려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사진기자들도 정말 손 전 지사가 맞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때 “손학규가 맞다”고 확인해준 사람이 명진 스님이었다. 아주 작은 일화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가끔 떠올린다. 정치권의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있었지만 스님은 누구를 만났는지를 과장해 내세우는 분은 아니었다. 사람을 오래 보고 기억하고, 필요할 때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나라가 어수선할 때면 가끔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회가 크게 흔들리는 일이 있을 때,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놓곤 했다. 스님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차분히 들었다. 내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 뒤 몇 마디를 보탰다. 특히 2024년 12월 계엄 사태 이후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울 때도 그랬다. 그보다 앞서 정치와 사회가 크게 소란했던 때에도 전화를 드리면 늘 비슷했다.
대중 앞에서는 거침없는 말을 하던 스님이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차분한 목소리가 참 그립다.
노벨평화상 시린 에바디 이란 변호사가 두 손 모았던 날
명진 스님을 생각하면 이란의 인권변호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시린 에바디(Shirin Ebadi) 여사와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2009년 8월 그해 만해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린 에바디 여사가 한국을 찾았을 때, 나는 그와 함께 명동성당을 방문했다. 에바디 여사는 그곳에서 정진석 추기경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봉은사로 향했다. 명진 스님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란에서 온 무슬림 여성 인권운동가가 한국의 절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명진 스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앞서 명동성당에서는 가톨릭의 정진석 추기경을 만났고, 이어 봉은사에서는 불교의 명진 스님을 만난 것이다. 종교가 달랐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국적도, 살아온 역사도 달랐지만 서로를 대하는 데 장벽이 없었다.
나는 그날 ‘큰 그릇’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나중에 스님께 편지를 보내면서도 그렇게 썼다. “작년 이맘때 시린 에바디 여사가 봉은사에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명진 스님께 두 손 모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모두 스님과 시린 에바디 변호사 모두 큰 그릇이기에 그러신 거였지요.”
당시 에바디 여사는 이란을 떠나 영국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스님께 그 소식을 전하며 “함께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고 부탁드렸다.
스님은 사람을 진영이나 종교로 먼저 나누는 분이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명진 스님은 사람을 먼저 보았다.
푸네를 유난히 아끼던 스님
또 한 명의 이란 여성이 있다. 언론인 푸네 네다이(Pooneh Nedai)다. 아시아기자협회와 오랫동안 함께해온 기자이자 시인, 작가다. 푸네 역시 명진 스님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푸네가 한국을 찾았을 때 함께 스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스님은 이란에서 온 그를 참 반갑게 맞아주셨다. 형식적인 환대가 아니었다.
푸네라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쓰는지 관심을 가졌고, 먼 나라에서 온 언론인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푸네도 스님을 깊이 존경했다. 특히 푸네가 이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어려움을 겪었을 때 스님은 그의 회복을 위해 각별히 기도해주셨다.
대중에게 명진 스님은 거침없는 발언을 하는 승려로 많이 알려졌다. 권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스님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서 본 모습에는 그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어주고, 이란의 무슬림 여성에게 합장하고, 아픈 외국인 기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스님에게 평화와 연대는 거대한 구호이기 전에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월악산 보광암, 그리고 이어진 안부
세월이 꽤 흘렀다. 봉은사를 떠난 뒤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어느 날 스님은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보광암에 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보광암입니다. 고맙습니다. ^^~^^” 2020년 6월 22일 받은 메시지다.
서울 한복판 봉은사에서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던 스님과 월악산 자락 암자에 머무는 스님. 겉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처럼 보이지만 내게는 같은 명진 스님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 안부를 여쭈었다. 2024년 11월에는 “존경하는 스님, 잘 지내시죠? 달포 남은 2024년 뜻대로 마무리하시길 응원합니다”라고 보냈다. 그해 12월 25일에는 이틀 늦은 생신 축하를 드렸다. 스님은 곧 답을 보내왔다.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건강하시길 축원합니다. 나이 들어보니 건강이 최고의 행복이더군요.”
짧은 문장이었다. 그때는 그 말이 이렇게 오래 가슴에 남을 줄 몰랐다. 며칠 뒤 마지막 날에도 새해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2025년 1월 1일 오전 6시 29분, 스님에게 답이 왔다. “이상기 거사님의 새해는 정의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는 을사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명진 스님다운 새해 인사였다. 건강을 빌면서도 ‘정의’를 잊지 않았다.

“스님의 깊고 높은 울림을…”
2025년 부처님오신날에도 메시지를 보냈다. “부처님오신 큰 뜻이 이 땅에서 구현되길 기도합니다. 중은 많은데 스님이 없다는 조오현 큰스님 말씀이 쟁쟁한 오늘, 스님의 깊고 높은 울림을 늘 기원합니다.”
지금 다시 읽으니 ‘깊고 높은 울림’이라는 말에서 눈길이 멈춘다. 나는 왜 그때 그런 표현을 썼을까.
명진 스님의 말에는 때로 거친 대목도 있었다. 누구에게는 불편했고, 누구에게는 지나치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스님 자신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20년 동안 지켜본 명진 스님은 편안한 길을 골라 걷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남북문제가 어려워지면 남북을 이야기했고, 권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권력을 향해 말했다. 종교가 다른 사람이 찾아오면 손을 잡았고, 먼 나라의 기자가 아프면 기도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답답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면 차분히 들어주었다. 그것이 모두 옳았는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침묵하면 편할 때 말했고, 외면하면 편할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만은 내 기억 속에 분명하다.
2005년 평양에서 처음 만난 뒤 20년. 평양의 밤도 지나갔고, 말목회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스님이 발행인을 맡았던 <민족21>과 함께 남북의 화해를 이야기하던 시절도 어느덧 오래전 일이 됐다. 봉은사에서 시린 에바디가 두 손을 모으던 모습도 오래전 일이 됐다.
그런데 사람 사이에 남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님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빌어주셨던 ‘정의의 깃발’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스님께 보냈던 ‘깊고 높은 울림’이라는 말을 다시 스님께 돌려드린다.
스님. 2005년 평양에서 처음 뵌 뒤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더 많은 말씀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여쭈어볼 것도 참 많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길이 있다고 믿게 해주셔서, 종교와 국적이 달라도 사람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셔서, 세상이 시끄러울 때 침묵하지 않는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셔서, 그리고 제가 답답할 때 말없이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스님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스님이 남긴 질문과 인연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20년 인연을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명진 스님, 스님의 깊고 높은 울림,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이상기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