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칼럼

[이상기 칼럼] “그래도 KBS가 있어서 다행이다”…시청자위원 2년을 마치며

KBS 본관
[아시아엔=이상기 아시아엔·매거진N 발행인, 전 한겨레신문 기자·한국기자협회 회장(2002~05) 역임] KBS 시청자위원으로 보낸 2년이 20일 공식 마무리됐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이자필반(離者必返)이라고 했던가.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고, 헤어지면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매달 회의에 참석해 방송을 보고 의견을 내면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자주 던졌다. “KBS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민영방송도 있고 종편도 있다. 유튜브와 각종 플랫폼에는 뉴스와 영상이 넘쳐난다. 이런 시대에 국민이 수신료를 부담하면서까지 KBS라는 공영방송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시청자위원회에서 이야기한 것도 결국 이 문제였다.

KBS는 남들이 다루는 뉴스를 뒤따라가는 방송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미처 보지 못한 문제를 먼저 발견하는 방송이어야 한다. 정치인의 한마디와 여야 공방도 필요하지만 저출생과 고령화, 지방소멸, 기후위기, 청년의 미래, 교육과 노동, 돌봄처럼 정권이 바뀌어도 남는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지역은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은 서울과 정치권만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다. 병원이 없어지고 학교가 문을 닫고 버스 노선이 사라지는 지역 주민들에게 그것은 하루하루의 생존 문제다. 전국에 지역방송국과 취재망을 가진 KBS가 지역의 목소리를 중앙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디지털과 AI의 변화도 피할 수 없다. 젊은 세대에게 밤 9시에 텔레비전 앞에 앉으라고 요구할 수 없는 시대다. 시청자가 있는 곳으로 KBS가 가야 한다. 모바일과 유튜브, 숏폼과 생성형 AI의 시대에도 ‘KBS가 전한 정보라면 한번 더 믿고 볼 수 있다’는 신뢰가 따라야 한다. 디지털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변하되 저널리즘에서는 누구보다 신중해야 한다.

시청률도 외면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시청자가 보지 않는다면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시청률이 프로그램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는 순간 KBS가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약해진다. 민영방송이 시청률 때문에 하기 어려운 프로그램, 당장은 많은 사람이 보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공영방송의 몫이다. 장애인과 이주민, 농어촌과 작은 마을, 사라지는 문화와 언어, 어린이와 노인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그렇다.

시청률 1%의 프로그램이라도 그 1%에게 꼭 필요한 방송이라면 그 가치를 따져야 한다. 동시에 ‘좋은 뜻’만 앞세우지 말고 더 재미있고 세련되게 만들어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해야 한다. 공익성과 시청률은 반드시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1990년 5월 KBS와 MBC 방송민주화 과정에서 한달 가까이 사건기자로 취재한 이후 35년 만에 지난 2년간 KBS 안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많이 배웠다. 밖에서는 쉽게 비판했지만 제작진과 토론하면서 시청률과 제작비, 편성 경쟁 속에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는 것과 공영방송의 원칙을 낮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금 KBS는 차기 시청자위원회 구성 문제조차 제때 매듭짓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사내 갈등과 제도 변경이 겹치면서 관련 추천 절차가 충분히 진행되지 못했고, 33기 시청자위원회가 언제 정상적으로 출범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는 제도대로 존중하되, 노사 모두가 자기 주장만 앞세우지 말고 한 걸음씩 양보해야 한다. 공영방송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필요한 절차라면 합리적인 선에서 타협하고, 법과 원칙 안에서 가능한 한 신속히 정상화하는 것이 맞다.

시청자위원회 구성 문제 역시 어느 한쪽의 승패로 볼 일이 아니다. 누가 더 많이 추천하느냐, 어느 쪽 사람이 더 많이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시청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33기 시청자위원회가 출범한다면 후임 위원들에게 몇 가지 부탁 드리고 싶다. 시청자위원은 저마다 추천을 받아 위촉된다. 언론, 여성, 소비자, 노동, 장애인, 청소년, 문화 등 각 분야와 단체를 배경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필요한 절차다. 그러나 위촉장을 받는 순간부터는 자신을 추천한 단체의 대변인이라는 자리에서 한 걸음 벗어났으면 한다.

시청자위원은 특정 직능이나 집단의 이해를 전달하는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분야,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시청자까지 대신 살펴야 한다. ‘누가 나를 추천했는가’보다 ‘지금 누구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빠져 있는가’를 먼저 물었으면 한다.

33기 위원회 구성도 이념의 균형을 맞추는 수준을 넘어섰으면 좋겠다. 보수냐 진보냐를 먼저 나누기보다 세대와 지역, 직업과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되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위원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KBS 자체에도 간곡히 바라는 것이 있다. 이제는 혼돈과 갈등의 질곡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정상화되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KBS의 지배구조와 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줄세우기도 이제는 끝낼 때가 됐다. 동시에 KBS 안에서도 소수 직원들이 정치적 성향이나 진영에 따라 편을 가르고 줄을 서는 문화가 있다면 그것 역시 사라져야 한다.

공영방송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밖의 권력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안의 구성원이 스스로 정치권을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는 일이다. 정치권의 후견주의가 도대체 언제까지 KBS에 필요할까. 여당이든 야당이든 KBS를 ‘우리 편 방송’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정권을 잡았다고 KBS까지 얻는 것이 아니며, 정권을 잃었다고 KBS까지 빼앗겼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KBS는 어느 정당의 전리품도, 어느 정치세력의 방패도 아니다.

정치권도 이제 KBS를 놓아줄 때가 됐다. KBS를 흔드는 것은 당장은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적 정보의 중심축인 공영방송의 신뢰가 무너지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다. 재난과 전쟁, 감염병과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국민이 함께 믿을 수 있는 공적 미디어가 없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과거 KBS가 국민에게 높은 신뢰를 받던 시절을 냉정하게 되짚어볼 필요도 있다. 특정 사장이나 특정 정권의 시대를 ‘KBS의 황금기’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진영논리가 될 수 있다. 다만 KBS가 언론 신뢰도와 영향력, 공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시기가 있었다면, 그때 무엇이 가능하게 했는지 다시 살펴볼 가치는 있다. 좋았던 시대를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보다 더 나은 KBS를 만들자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독립은 어느 한쪽이 KBS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서 시작한다. 사장과 경영진, 노조만 독립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기자와 PD, 모든 구성원이 정치권의 인정이나 보호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직업윤리와 취재·제작의 원칙으로 서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평가하는 최종 기준은 정권도, 정당도, 노조도 아닌 시청자여야 한다.

2년 동안 시청자위원으로 KBS를 지켜보며 가장 많이 느낀 것도 그것이다. 시청자위원회가 경영진을 편드는 자리여서도 안 되고, 경영진을 공격하기 위한 자리여서도 안 된다. 특정 프로그램에 점수를 매기는 데 그쳐서도 안 된다. 한발 떨어져 묻는 자리여야 한다.

이 방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가 놓친 사람은 없는가.
권력자의 목소리는 넘치는데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닌가.
오늘의 시청률 때문에 내일을 위한 방송을 포기한 것은 아닌가.

32기 KBS 시청자위원회 2년을 마치며 KBS에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국민보다 반걸음 앞서 질문하고, 국민이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먼저 비추는 방송.
권력의 눈치보다 시민의 평가를 더 두려워하는 방송.
지역과 세대를 연결하고 우리말과 저널리즘의 품격을 지키는 방송.
시청률을 외면하지 않되 시청률만 좇지 않는 방송.
그리고 보수와 진보 어느 한편이 아니라 국민의 편에 서 있는 방송.

그런 KBS라면 국민도 기꺼이 지켜줄 것이다. 정치권도 KBS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고, KBS 구성원들도 정치권의 후견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이 어서 왔으면 한다. 새로 출범할 33기 시청자위원회가 그 길을 재촉하는 건강한 감시자이자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어느 날 국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KBS가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 2년을 마치며 내가 얻은 결론은 그 한마디다. KBS가 지금보다 더 독립적이고, 더 신뢰받고, 더 국민 가까이에 있는 공영방송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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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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