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문화

[류재국의 ‘고전’에게 묻다①] 플라톤의 <국가>와 한국 정치…”권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철학은 과거를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새 연재 ‘오늘을 비추는 고전의 질문’은 플라톤의 『국가』를 시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루소의 『사회계약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자의 『논어』 등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오늘의 정치와 사회, 시민의 삶을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입니다. 이 연재는 고전을 해설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고전이 던진 질문을 오늘의 현실과 연결하고, 영화·연극·문학 등 예술 작품까지 함께 살펴보며 독자들이 철학을 삶 속에서 체감하도록 안내합니다. ‘정답’보다 ‘질문’을 중시하는 이 연재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제공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AI 생성 이미지

“왜 이렇게까지 불평등은 깊어졌을까.”

오늘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무거운 질문 가운데 하나다. 부의 격차는 커지고, 교육마저 계층을 대물림하는 통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청년들은 출발선부터 다르다고 느끼고, 정치권은 ‘공정’을 말하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불평등은 이제 소득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회와 신뢰의 격차로 번지고 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2400여 년 전 플라톤이 남긴 <국가>(Politeia)를 다시 펼쳐볼 필요가 있다. 흔히 이상국가를 설계한 정치철학서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단 하나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

플라톤에게 정의는 법을 엄격히 집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동체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공동선을 이루는 조화로운 질서였다. 그는 국가를 인간의 영혼에 비유했다. 영혼은 이성과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성이 욕망을 절제할 때 올바른 삶이 가능하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혜로운 통치자가 나라를 이끌고, 용기 있는 수호자가 질서를 지키며, 생산 계층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건강한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욕망이 권력을 지배하는 순간 국가는 흔들린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플라톤의 경고는 낯설지 않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불평등은 심화됐고, 권력은 공공의 이익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비판을 받는다. 국회는 숙의보다 대결을, 설득보다 진영 논리를 반복하고, 정책은 장기적 국가 비전보다 선거를 의식한 단기 처방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플라톤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는 ‘욕망이 이성을 지배하는 국가’에 가까운 모습이다.

철인정치는 흔히 엘리트 지배로 오해되지만 플라톤의 뜻은 달랐다. 그가 말한 철인은 선(善)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욕망을 절제하며 공동선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는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국가의 불행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이 말은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받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결국 한국 정치를 둘러싼 논란도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공직은 누구를 위한 자리인가. 정당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국민이 정당을 위해 존재하는가. 공직자가 국민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우고 권력을 특권처럼 여긴다면 정의로운 국가는 멀어진다. 권력기관 간 갈등과 정쟁, 이해충돌 논란, 공직자의 도덕성 문제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권력을 책임보다 특권으로 인식하는 구조의 결과일 수 있다.

플라톤에게 권력은 가장 큰 혜택이 아니라 가장 무거운 의무였다. 불평등은 시장 경쟁보다 제도의 공정성이 무너질 때 더욱 고착된다.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소득의 차이보다 기회의 차이다. 같은 노력을 해도 다른 출발선을 가진 현실,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과 취업을 좌우하는 구조, 법과 제도가 누구에게는 엄격하고 누구에게는 관대한 현실이 사회의 신뢰를 흔든다.

플라톤이라면 이를 ‘정의의 위기’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는 국가가 올바르려면 교육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고 믿었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라 시민의 덕성과 판단력을 기르는 과정이었다. 좋은 지도자는 선거 직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 교육과 성찰 속에서 길러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더욱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실이라고 믿지만 철학자는 동굴 밖으로 나가 진실을 보고 다시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준다. 오늘 우리는 과연 동굴 밖을 보고 있는가.

알고리즘이 추천한 정보만 소비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뉴스만 선택하며, 정치적 진영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만 세상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민주주의 역시 동굴 속 그림자에 갇힌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성숙한 시민과 책임 있는 지도자가 함께 만드는 문화다.

물론 플라톤의 <국가>가 오늘날 그대로 적용될 해답은 아니다. 그의 철인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와 충돌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한 질문은 남는다. 누가 권력을 잡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오늘 한국 사회의 불평등도 경제정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 신뢰받는 공직사회, 책임을 다하는 정치,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 참여가 함께할 때 공동체는 정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난해한 대화와 철학적 논증 때문에 첫 독서에서 벽을 느끼는 이도 많다. 그러나 철학은 반드시 철학책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좋은 예술은 철학의 질문을 삶으로 번역해 준다.

먼저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2012)을 권하고 싶다.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과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정의를 묻고, <링컨>은 권력이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플라톤의 질문을 활자 밖의 인간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훌륭한 길잡이다.

플라톤은 2400년 전 “정의로운 국가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었다. 오늘 우리에게 남은 질문도 다르지 않다. 권력은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 정의는 법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을 특권이 아닌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정치,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는 시민의 태도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2400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를 다시 읽는 이유는 이상국가를 꿈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권력이 특권으로 변하는 순간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지고, 권력이 책임으로 작동할 때 정의로운 사회의 가능성은 열린다.

그것이 플라톤이 오늘의 정치에 남긴 가장 오래된 질문이며, 지금도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류재국

문화비평가, 서양고전극연구소장, 철학박사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