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6·25는 남침” 외쳤던 아롱…70년 만에 “그가 옳았다”

1979년 6월 20일 사르트르, 앙드레 글뤽스만, 레이몽 아롱(왼쪽부터) 세 사람이 베트남 보트피플 구조 캠페인을 벌이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당시 사르트르와 아롱 두 사람은 수십 년간의 절연 끝에 이 캠페인을 계기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사진 박정자 교수 제공>

한반도를 남북으로 두 동강 낸 6·25전쟁은 프랑스 지성계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는 6·25가 ‘남한의 북침’이라는 소련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고, 작가 장 폴 사르트르도 이에 동조했다.

사르트르와 고등사범학교 동기이자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함께했던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은 <르 피가로>에 6·25가 ‘북한의 남침’이라는 정반대의 글을 기고했다.

알베르 카뮈

프랑스 군대는 유엔군에 참여해 남한을 지원했지만, 좌파에 이끌리던 프랑스 지식사회는 사르트르를 지지하면서 소련을 정의의 사도로, 미국을 악마의 세력으로 간주했다. 사르트르의 일방적 승리였다. 늘 중도의 양심에 충실했던 알베르 카뮈만이 외롭게 사르트르를 비판했을 뿐이다.

알제리 독립전쟁과 68혁명을 거치면서 좌파 세상이 된 프랑스에서 아롱은 설 자리가 없었다. 우파 지식인들마저 “아롱과 함께 옳기보다는 사르트르와 함께 그르는 편이 낫다”는 반지성적 분위기에 휩쓸렸다.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도 “새로운 미래를 위한 진보적 폭력”이라고 옹호한 사르트르는 북한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자 ‘남침 유도설’을 제기했다. “북한이 남침하도록 미국이 함정을 팠다”는 주장이다. ‘폭력의 사실보다 폭력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식의 억지 논리였다.

소설 <자유의 길>을 쓰고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고 외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전체주의 도그마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했다.

2017년 7월 2일, 사르트르가 창간한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은 “슬프다! 레이몽 아롱이 옳았다”(Raymond Aron avait raison, hélas!)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실었다. 거의 70년 만의 참회였다. “아롱이 사르트르를 반대한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아롱이 옳았다.” 뒤늦게나마 사르트르의 오류를 자백한 것이다.

6·25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아롱은 우파 지식인들이 좌파의 위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거의 홀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입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찬양하면서 실제로는 부르주아지의 삶을 즐기는 사르트르가 아롱의 눈에는 ‘살롱 좌파’, ‘부르주아 좌파’의 위선자로 비쳤을 것이다.

아롱은 6·25전쟁 직후에 쓴 <지식인의 아편>에서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좌파가 진보의 이름을 독점하고 민중에게 거짓 선전과 선동을 일삼는 현실을 개탄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뒤집어 ‘공산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비판한 아롱은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 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사이비 종교라고 질타했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주의 사상은 민중을 고난으로 이끌 뿐이다. 거대한 수용소 국가로 전락한 소련의 모습이 이를 대변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잘못된 길로 내모는 좌파 지식인은 아편 중독자다. 객관성·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상은 억지요 고집일 뿐이다.”

사르트르도 소련의 강제수용소가 나쁘다는 것을 인정했고, 카뮈도 식민제국주의와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체제를 비난했다. 모두 전체주의 독재를 반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와 카뮈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롱은 그 차이를 “마지막에 카뮈는 서방 진영을 선택했고, 사르트르는 공산 진영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이지 않다”고 단언한다. 절대주의와 전체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남침 유도설, 진보적 폭력, 부르주아 좌파, 거짓 선전·선동, 포퓰리즘, 오류 없는 이념, 사상적 절대주의….아롱과 카뮈가 사르트르와 대척점에서 맞섰던 주제들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남에게는 “모두 용이 될 필요가 없고 개천에서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녀에게는 입학 관련 서류를 위조해 준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법학교수이자 법무부 장관이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둘로 갈라져 사르트르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프랑스 지성계는 약 70년 뒤 아롱의 승리로 뒤집혔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라진 6·25의 현장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 상태 그대로이고, 대한민국 안에서도 이른바 강남 좌파가 여전히 적지 않은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6·25전쟁 76주년을 앞두고 나는 다시 <리베라시옹>의 그 머리기사를 떠올린다. 70년 만의 참회. “레이몽 아롱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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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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