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평생 동양철학의 길 걸어오신 양재혁 교수님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신 교수님께서는 더 깊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철학의 본고장인 독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1978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이어 1983년 독일 카를스루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시며 지성적 토대를 다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이 빛나는 성취 뒤에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지독한 고독과 고초의 세월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낯선 독일 땅에서 홀로 학문과 사투를 벌이던 시절, 교수님께서는 가난한 고학생이 감당해야 했던 모진 시련을 온몸으로 버텨내셨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죽 염색공장에서 땀을 흘리고, 거친 병따개 공장 라인에서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심지어 차마 손대기조차 힘들고 고된 소와 돼지의 부속물을 세탁하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낮에는 거친 노동 현장에서 삶의 바닥을 경험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서양의 논리학과 철학을 파고들던 그 눈물겨운 역경이 있었기에 독보적인 학문적 탑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동양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신 교수님의 일성은 당차고 매서웠습니다. 당대 철학계에 “동양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서양 논리학의 탄탄한 기초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변하시며 강단에서 직접 논리학을 강의하셨던 선구자적 혜안은, 바로 그 치열했던 독일 유학 시절의 고뇌에서 나온 결정체였습니다. 당대 석학이던 김용옥 선생과 동양사상을 두고 벌이던 치열하고도 격조 높은 논쟁은 한국 철학계의 위대한 불꽃이었으며, 성균관 유학대학 학장을 역임하며 유학대학의 기강을 바로잡고, 매제 심윤종 총장과 함께 학교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던 기개는 공의(公義)를 실천하는 진정한 군자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2026년 5월 현재, 이제 교수님께서는 상아탑에서의 모든 소임을 완수하고, 그토록 치열했던 지상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은 채 우리 곁을 떠나려 하십니다.
그러나 교수님, 이토록 황망하게 가시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 하이데와 든든한 사위, 그리고 그 모진 세월을 묵묵히 곁에서 함께 버텨내신 사모님을 두고 어찌 눈감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평생을 학자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시대의 지성이라는 책임감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시느라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하셨을 가족을 향한 그 깊은 사랑과 미안함을 뒤로한 채, 어찌 이리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십니까.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메워지지 않을 커다란 슬픔과 눈물을 남겨두고 떠나시는 교수님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야속하고 가슴이 미어집니다.
하지만 교수님, 너무 걱정하며 떠나시지는 마십시오. 여기 남아 있는 제자들은 교수님께서 온몸으로 갈고닦아 오신 그 거룩한 학문적 궤적을 본받고, 또 온전히 계승하여 세상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켜주신 논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그 올곧은 기개를 이어받아 후학의 도리를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다짐합니다.
독일의 차가운 지하방에서 거친 노동을 견디며 철학을 짜내던 청년 양재혁의 기상부터, 성균관의 스승으로서 학문의 기틀을 바로잡던 노학자의 올곧음까지, 교수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였습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가장 고된 곳에서 찬란한 학문을 꽃피우셨던 교수님의 이름은 성균관의 교정에,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불멸의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학문 앞에서는 추호의 타협도 없던 엄격한 스승이셨고, 가족 앞에서는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애틋했던 남편이자 아버지이셨던 양재혁 교수님. 부디 저 하늘에서는 고되었던 아르바이트의 기억도, 학문과 시대의 무거운 짐도 다 잊고 남겨진 가족들과 제자들의 앞날을 따뜻하게 굽어살피시며 영면하소서.
삼가 머리 숙여 양재혁 교수님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간절히 빌어 올립니다.
양 교수님, 교수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