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20년 만에 서울에 등장한 대만 사절단

지난 1992년 단교의 앙금으로 내내 서먹서먹했던 대만과의 관계가 모처럼 풀어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 대만 정부가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중국의 항의에 따라 대만 대표단의 취임식장 입장을 거절하기도 했던 지난번의 안절부절 못하던 사례에 비해서는 양국 관계가 몇 걸음이나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대만 사절단은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 입법위원 6명으로 구성되었다. 취임식에 참석하고는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고 곧바로 귀국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다. 특히 왕진핑 입법원장은 지난해 11월 성균관대학교에서 ‘SKKU Distinguished Fellow’를 받는 등 개인적으로도 한국과 친분이 많은 친한파 인사로 알려져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 사절단에 중국문화대학의 장징후(張鏡湖) 이사장 등 학교 관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인 1987년 타이베이에 있는 이 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던 인연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이 이사장을 맡았던 영남대학교가 문화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2001년에는 이 대학에 개설된 최고산업전략과정을 수료했다고도 한다.

이번 대만 사절단의 취임식 참석은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때도 왕진핑 입법원장이 천탕산(陳唐山) 국가안전회의 비서장과 함께 사절단으로 방한했다. 천 비서장은 당시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특사 자격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미리 알려짐으로써 중국의 완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끝내 취임식장 입구에서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외교 전례로도 드문 사례였다.

그때 중국 측에서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특사로 탕자쉬안(唐家璇) 국무위원이 방한하고 있었기에 한국 외교당국으로서는 대처하기가 더욱 난감했을 것아다. 대만 대표단의 취임식 참석을 허용한다면 자기들은 그냥 철수하겠다고 버티었기 때문이다. 중국 측의 지나친 압력도 압력이지만 한국측의 대응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 그때 대만 사절단은 결국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마련한 만찬에 참석하는 정도로 울분을 달래야 했다.

우리 정부가 정식으로 초청장을 발송해 놓고도 입장을 막아야 했던 경우였기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단교 이래 줄곧 양국관계가 엉거주춤했던 것은 이처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눈치를 먼저 살펴야 했던 까닭이다. 지난해 대만에서 마잉지우(馬英九) 총통이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5월에 취임식을 가졌을 때 우리 정부가 공식 대표단을 파견하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우리 정부는 이번에도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명의로 초청장을 보내면서 중국의 간섭을 우려해서 매우 은밀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대만 대표단의 입국과 취임식 참석에 대해서는 사전에 철저히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 주재하는 대만대표부 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취임식 당일 여의도에서 취임식이 시작되고 난 뒤에야 이 사실이 정식으로 언론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미리 알고도 그냥 모른 체 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에도 문제를 제기한다면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는 마잉지우 총통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힐 것이고, 그것은 시진핑(習近平) 체제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혹시 사전에 몰랐다 하더라도 사후적으로라도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는 것을 보면 이런 유추가 충분히 가능하다.

어쨌거나, 대만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한국은 현재 중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따라 대만과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교류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무역이나 문화 등 민간분야에서는 교류를 넓힐 수 있는 방안이 적지 않다. 대만 외교부가 지난해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 한국과의 지속적인 관계증진을 기대한다며 축전을 보낸 것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대만과의 관계가 끊어지기 전에는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던 사항이다. 단교 이전이던 1988년의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때는 대만 측에서 당시 류궈화(兪國華) 행정원장과 딩마오스(丁懋時) 외교부장이 축하사절로 방한했다. 취임식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를 방문해 노 대통령에게 당시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친서를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교조치와 함께 공식적인 교류는 끊어지고 말았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에는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의 아들로 국민당 비서장이던 장샤오옌(蔣孝嚴) 입법위원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을 뿐이며,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는 대만 측에서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는 장쥔슝(張俊雄) 전 행정원장과 리자이팡(李在方) 무임소 대사가 슬며시 입국해 4만명의 일반 축하객 자리에 앉았다가 돌아간 일이 있다.

이번 대만 대표단의 취임식 참석이 더욱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과거의 사례들 때문이다. 20년 만에 비로소 물꼬가 트인 것이다.?이제 대만과의 관계를 떳떳하게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중국이 자기들은 북한과의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우리에 대해서만 대만과의 관계를 자제토록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압력이다. 미국이나 일본이 대만과의 국교 단절과는 관계없이 활발한 교류를 벌이고 있는 점을 참고로 삼을 만하다.

다행스럽게도 민간교류 측면에서는 대만과의 관계가 상당히 발전되고 있다. 교역부문에서 서로 5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며, 직항로의 개설로 연간 70만명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한류에 대한 인기도 대단하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반한감정이 부분적으로 엿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한국이 정말로 미워서라기보다 우리의 미적지근한 처신에 대한 하나의 애증의 표현이라 여겨진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는 대만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외교의 상대국인 중국의 존재나 입장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대만과의 관계에서 실익을 찾아나가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바로 외교의 역량이다. 전통적으로 형제 국가라던 대만과의 관계에서 외교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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